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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주의-1

(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 - 신복음주의의 입장)

 

  복음주의자란 본래 프로테스탄트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 용어였으나 19세기 들어 복음주의자들이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로 양분되면서 그 의미가 바뀌게 되었다. 자유주의자들은 복음주의자로 자처했으나, 대 각성운동의 특징과 강조점들을 대부분 포기한 반면, 역사 비평적 성서연구 방법을 채택하고, 현대 과학의 진화론을 수용했다. 이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반작용으로 일어난 것이 근본주의다. 그것은 20세기 초 자유주의와 현대주의의 도전으로부터 성서적이며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을 보존하기 위해 미국에서 일어난 신앙운동이다. 오늘날 복음주의는 넓은 의미로 18세기 부흥운동을 계승한 신앙전통을 말한다면, 좁은 의미로 그 하부 그룹인 신 복음주의를 말한다.  신 복음주의는 근본주의 영향권에서 성장한 온건한 보수주의 기독교인들의 운동이요, 자유주의와 근본주의 사이에 위치하기를 선호하는 신자들의 그룹이다.

  근본주의와 신 복음주의는 1960년대까지 명확한 경계선 없이 모호하게 구분되었다.  양자의 차이는 신학이나 교리 보다 오히려 신앙의 양태에서 발견된다. 신 복음주의는 기독교 정통주의의 기본 교리들을 변호하는데는 근본주의와 입장을 같이 한다. 반면, 기독교인의 사회적 관심을 소홀히 하는 전자의 폐쇄주의와 분리주의에는 입장을 달리하고 사회 참여와 주류 교회와의 대화에 개방적이다. 근본주의자들과 신 복음주의자들은 서로부터 그들 자신을 예리하게 구별하며, 대립하고 논쟁하고 있다.  근본주의자들은 신 복음주의자들이 자유주의로 교묘하게 후퇴하고 있으며, 근본주의를 현대주의에 넘겨주려고 하는 전복자 또는 근본주의 내부로부터의 적으로 취급한다. 반면, 신 복음주의자들은 근본주의의 학적 빈곤과 사회관심 부족을 비판하고, 근본주의자들은 진정한 역사적 복음주의로부터 단절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현대 복음주의 운동을 대변하던 근본주의에서 신 복음주의가, 그리고 신 복음주의에서 진보적 복음주의가 일어났다.  왜 현대 복음주의는 하나의 흐름을 유지하지 못하고, 여러 가닥으로 나뉘어 서로 대립, 갈등하고 있는 것일까? 이 연구는 근본주의, 신 복음주의, 진보적 복음주의로 이어지는 현대 복음주의 운동의 흐름을 추적하는 동시에, 이들의 특징과 차이점을 밝히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I  근본주의

   

  마틴 마티(Martin Marty)에 따르면, "미국 신학의 흐름을 논하면서 근본주의를 언급하지 않는 것은 미국의 자연경관을 살피면서 로키 산맥을 빠뜨리는 것과 같다."1) 미국의 기독교 신자 중 근본주의자는 2천 3백만 명으로 추산되며, 미국 목사의 20%와 평신도의 25%가 근본주의자로 분류될 수 있다. 미국 전체 인구의 20 -25%가 어떤 형태로든 근본주의 단체와 연관이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2) 4천만으로 추산되는 미국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대략 10분의 1이 근본주의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

 

  근본주의는 극단적으로 서로 다른 평가를 받고 있다. 지지자들은 근본주의가 "원칙적으로 기독교 자체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주장한다.3) 근본주의는 성경과 역사적 기독교 신조를 믿는 현대 복음주의의 하부 그룹이요, 한 지류다. 반면, 비판자들은 근본주의자란 용어를 조롱과 경멸의 뜻으로 사용하며, 그것을 비교화주의, 분리주의, "새로운 이단," 혹은 "왜곡된 기독교"로 평한다. 근본주의는 현대의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주고 있다.  그것은 흔히 편협하고 논쟁 지향적이며 분파주의적인 것으로 간주되기도, 심지어 혐오받는 운동으로 취급되기도 한다.4)    

 

  최근 근본주의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종래의 근본주의에 대한 이해는 사회학적 해석이 일반적이었다.  근본주의를 "고사적(枯死的) 삶의 방식을 극단적이며 필사적으로 옹호하는 것"으로, 그리고 근본주의자를 사회적 책임에 무관심한 반 사회주의자 또는 분리주의자로 취급하는 것이다.5) 그러나 1970년대 들어, 샌딘(Ernest R. Sandeen)은 사회학적 설명을 거부하고 근본주의를 신학적이며 교리적으로 해석했으며, 1980년대 들어 마스든(George M. Marsden)은 그것을 문화적인 면에서 고찰함으로써 근본주의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더욱 넓혔다.

 

 

1. 근본주의의 기원

 

  근본주의는 매우 다양하고 정의하기 쉽지 않은 현상이다.  근본주의에 대한 만족스런 정의도 근본주의 근원에 대한 합의된 해명도 발견하기 어렵다. 학자들마다 견해와 해석이 다르다.  근본주의란 말은 어떤 하나의 특정 집단보다는 오히려 넓은 범위의 지성적이며 종교적 흐름을 가리키고 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근본주의가 1910년대, 즉 [근본적인 것들]이 출판되던 기간(1910-1915)에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이전에는 복음주의자와 근본주의자, 또는 보수주의자와 근본주의자가 구분되지 않았다. [근본적인 것들] 출판 이후, 극우파 보수주의자들이 근본주의자로 불리게 되었다.  근본주의자란 말은 1920년 미국 북 침례교 대회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침례교잡지 [와치먼 이그재미너](The Watchman Examiner)의 편집자 커티스 로스(Curtis L. Laws)가 침례교 보수파를 가리키기 위해 그 용어를 만들었다.  로스는 근본 교리를 위해 전쟁을 치를 각오가 된 사람들을 근본주의자로 규정했다.6) 근본주의자 자신들은 근본주의자라는 명칭 보다 오히려 보수적 복음주의자라는 명칭을 좋아한다.  그러나 모든 보수적 복음주의자가 곧 근본주의자는 아니다.  근본주의는 일반적으로 극우파 보수주의를 의미한다.

 

  근본주의의 뿌리에 대한 해명 역시 다양하다. 이를 분류하면, 사회학적 설명, 교리 및 신학적 설명, 문화적 설명 등으로 정리된다. 샌딘의 [근본주의 뿌리](The Roots of Fun- damentalism), 마스든의 [근본주의와 미국 문화](Fundamentalism and American Culture)를 중심으로 근본주의 근원에 대한 논의롤 살펴보자.

 

  사회학적 해석은 1970년 샌딘의 [근본주의의 뿌리] 출현 전까지 지배적 견해였다.  그것은 근본주의를 사회적 현상, 즉 사회적 부 적응과 도시와 농촌간의 문화적 갈등의 파생물로 보는 것이다.  옛 질서가 사라지면서 나타난 하나의 부산물이 근본주의다.  새로운 사회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보수주의자들이 근본주의자가 되었다. 특히 리챠드 니버는 근본주의가 "미국 농촌문화 대 도시문화의 충돌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했다.7)  

 

  교리적 해석은 근본주의를 사회적 현상이 아닌, 진정한 종교운동으로 간주하고, 그 뿌리를 순수한 교리 전통에서 찾는 것이다.  샌딘은 근본주의가 1920년대 이 후에도 소멸되지 않고 강하게 살아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사회학적 해석을 거부했다.  왜냐하면 사회학적 해석이 정당하다면, 반사회적이며 반지성적인 근본주의 교회들은 이미 사라졌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샌딘은 1920년대의 사회적 사건들 보다 오히려 전천년설적인 천년왕국운동과 프린스톤신학이 근본주의를 이해하는 단서가 된다고 주장했다. 즉 샌딘에 따르면, 근본주의의 근원은 세대주의와 프린스톤신학이다.  "근본주의는 19세기의 서로 연합될 수 없는 두 신학의 조류, 즉 세대주의와 프린스톤신학이 1918년까지 공동의 적인 현대주의와 싸우려고 공동전선을 펴기 위해서 형성한 일종의 연합 운동이다".8) 세대주의적 천년왕국주의자들은 프린스톤 신학으로부터 성경 무오 교리를 받아들였다.

 

  샌딘은 근본주의를 사회적 현상으로만 보는 종래의 견해를 교정하고, 그것을 종교운동으로 이해함으로써 근본주의 해명에 큰 공헌을 했다. 그럼에도, 그는 근본주의 운동을 지나치게 좁게 정의한 것으로 비판받는다. 그는 근본주의를 세대주의와 프린스톤신학의 동맹으로, 그리고 근본주의 운동을 천년왕국 운동의 재 명명으로 본 것이다. 따라서 그는 1920년대의 전투적이고 반현대주의적인 폭 넓은 현상을 적절히 다루지 못했다.  이런 샌딘의 교리적 해석을 수정, 보완한 것이 문화적 해석이다.

 

  문화적 해석은 1차 대전 후의 문화적 위기 의식이 근본주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근본주의를 일차적으로 종교운동으로 이해하면서도, 근본주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정치, 사회, 문화적인 면을 주목한다.  근본주의는 20세기 초 미국의 환경에 의해 독특하게 형성된 복음주의 기독교의 변형이다.  근본주의자는 새로운 문화에 항거하고 과거의 생활을 유지하기 원하는 보수주의자다. 이 견해를 대변하는 대표적 학자가 마스든이다. 샌딘이 근본주의의 근원을 세대주의와 프린스톤신학으로 보는 것과 달리, 말스덴은 그것 이외에도 다른 요소들이 있음을 주장했다. 말스덴에 따르면, 근본주의는 "기독교를 현대 사상 속에 집어넣으려는 현대주의자들에게 맹렬하게 대항한 운동"으로서 "여러 가지 서로 모순되거나 절대로 일치할 수 없는 전통과 흐름의 모자이크였다."9)  말스덴은 근본주의의 중심신학을 형성한 것은 부흥회주의와 경건주의 전통이었으며 여기에 성결운동와 프린스톤 신학전통이 첨부되었다고 보았다. 또한 19세기 후반 미국을 지배하던 상식 실재론이 근본주의 사상의 토대가 되었으며, 전천년주의자들이 근본주의 형성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

 

  요약하면, 근본주의는 어떤 특정 집단을 가리키는 명칭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광범위한 지성적, 종교적인 흐름을 나타내는 명칭이다.  그것은 현대주의에 대항하여 성서적 기독교를 보존하려 했던 다양한 그룹의 연합체였다. 따라서 한, 두 가지 신앙전통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19세기 부흥운동의 신학과 프린스톤신학을 근간으로 하여 여러 줄기의 복음주의적 흐름이 그것이다.

 

 

2. 근본주의의 발전

 

  근본주의 형성에 큰 영향을 준 것은 19세기 부흥운동이었다.  특히 1878년 나이아가라 성경대회(the Niagara Bible Conference)에서 채택된 나이아가라 신조는 근본주의의 중심적인 신앙고백이 되었으며, 1895년 나이아가라 대회에서는 근본주의란 말이 성서해석의 기본 입장을 진술하기 위해 사용되었다.10)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근본적인 것들](The Fun-damentals)이란 제목의 소책자가 미국에서 발간되던 기간을 근본주의의 시작으로 간주하며, 근본주의란 용어도 이 책자로부터 유래했다고 본다.11)   

 

  [근본적인 것들]은 1910년부터 1915년까지 유럽과 미국의 신학자들의 공동 작업으로 총 12권이 출판되었다. 몰간(G. Campbell Morgan), 워필드(Benjamin B. Warfield), 올(James Orr), 토레이(R. A. Torrey), 피어슨(A. T. Pierson), 어드만(Charles Erdman) 등 저명한 보수주의 학자와 설교가들이 성경의 영감과 권위,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신성, 초자연적 이적 행사와 대리적인 속죄의 죽음, 육체적 부활과 승천을 기독교 신앙의 근본 원리들로 간주했다.  그것은 미국 로스엔젤레스의 두 명의 평신도, 레이먼(Lyman)과 스튜와르트(Milton Stewart)의 재정지원으로 출판되어 영어 사용권의 목사, 전도사, 선교사, 평신도 지도자 등에게 무료로 3백만 부 이상 배포되었다. 

 

  근본주의 운동은 20세기 초반기를 거쳐 조직화되었다.  1910년 미국 북 장로교회 총회는 근본주의자들의 영향력에 의해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육체적 부활, 기적으로 요약되는 5개조의 교리를 기독교의 본질적 신앙으로 선언했다.  그것은 1916년과 1923년 총회에서 재확인되었다.

 

  근본주의자와 자유주의자는 포스딕 사건을 통해 첨예하게 대립되었다. 포스딕(Harry E. Fosdick)은 침례교 출신의 자유주의 신학자요 저명한 설교가였다.  그는 뉴욕 제일장로교회 초청목사로 활동하면서 1922년 6월 "근본주의자들이 승리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해 자유주의 측의 반격을 주도했다.  그는 자유주의자들도 기독교인임을 강조하는 한편, 근본주의자들의 편협과 불 관용을 비판했다. 반면, 클래런스 매카트니(Clarence E. Macartney)는 보수주의의 공격을 선도하여 "불 신앙이 승리할 것인가" 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해 포스딕에 대응했다.  그는 자유주의가 교회를 서서히 세속화시키고 있다는 것과, 이를 저지하지 않으면 새로운 종류의 기독교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12) 

 

  한편, 1924년 총회 직후, 자유주의자들의 주도로 어번선언(the Auburn Affirmation)이라고 불리는 문서가 150명의 서명과 함께 출판되었다.  그것은 총회가 어떤 교리를 본질적인 것으로 정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과 총회가 선언한 5개조의 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또한 성경 무오의 교리를 "매우 해로운 교리"로 간주했다.13)  이 어번 선언을 둘러싸고 찬성과 반대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며 논쟁이 계속 이어졌으며, 장로교가 분열되기 시작했다.      

 

  한편 침례교단에서는 1919년 북침례교회의 라일리(William B. Riley), 남 침례교회의 모리스(Frank Morris), 카나다 침례교회의 쉴즈(Thomas T. Shields)의 주도로 필라델피아에서 세계 기독교 근본주의 협회(World's Christian Fundamentals Associations)가 창립되었다.  이 모임은 "문서, 자유주의자와의 논쟁, 성경대회를 통해 미국인의 신앙생활의 우선 순위를 성서적 기독교에 두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14) 이들은 1923년에 침례교 성서 연합(the Baptist Bible Union)을 만들었으며, 이것이 모체가 되어 1932년 근본주의 침례교단(the General Association of Regular Baptist Churches)이 창립되었다. 또한 디한(M.R. DeHaan), 왈부우드(John F. Walvoord), 버스웰(J.O. Buswell, Jr.)을 중심으로 미국 독립 근본주의 교회(the Independent Fundamental Churches of America)가 조직되었다.  이 밖에도, 근본주의 교단으로 미국 침례교 협회(the American Baptist Association), 그레이스 형제단(the Grace Brethren)등이 창립되었다.

 

  성서학원의 설립과 대중 매체의 활용이 근본주의의 확장에 크게 공헌했다. 특히 성서학원은 근본주의 운동의 가장 독특하고 중요한 제도였다.  심프슨(A.B. Simpson)의 선교사 훈련원(Missionary Training Institute, 1882)과 무디(D.L. Moody)의 무디 성서학원(Moody Bible Institute, 1886)을 비롯하여 50개 이상의 성서학원들이 설립되어 근본주의 입장에 선 인물들을 배출했다.  또한 근본주의자들은 대중 언론매체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그들의 입장을 전파하는데 신문, 방송, 잡지를 적극 활용했다.

 

  근본주의의 운동은 1920년대에 절정을 이룬 후, 급격히 약화되었다.  그 원인은 두가지 정리된다.  첫째, 현대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패배한 것이다.  1925년 근본주의자와 진화론자의 대립으로 일어난 원숭이 재판은 근본주의의 대중적인 기반에 결정적 타격을 주었다. 테네시주 데이턴의 고등학교 교사 스콥스(John Scopes)는 학생들에게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을 금하고 있는 테네시주의 법령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고발당했다. 국방상을 역임한 유명한 변호사요 교회 장로인 브라이언(William J. Bryan)이 근본주의 입장을 변호한 반면, 무명의 신문 기자 대로는 스콥스를 변호했다. 이 재판은 근본주의와 현대주의의 싸움이었다.  스콥스는 진화론을 가르친 것에 대해 유죄가 인정되었다. 반면, 언론과 여론은 근본주의를 비난, 정죄했으며, 현대 과학에 대한 브라이언의 무지가 폭로되었다.  이 재판의 여파로 근본주의자들은 몽매주의자라는 꼬리표가 붙게 되었으며, 일반 대중들로부터 무식하다는 불신을 받게 되었다.  또한 근본주의자들은 교권투쟁에서도 패배하여 교단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소수파로 밀려나게 되었다. 

 

  둘째, 근본주의 운동 내부의 갈등과 분열이다.  근본주의로부터 신 복음주의와 전투적 근본주의가 분열되었다.  근본주의자들 가운데 논쟁 지향적이며 반 지성주의적 경향과 사회문제에 대한 무관심한 태도에 반기를 드는 그룹이 일어났다. 신 복음주의 운동이다.  그들은 1941년에 미국 복음주의 협회(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를 만들었으며, 이것은 옥켄가(Harold Ockenga), 헨리(Carl Henry),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등의 지도하에 크게 성장했다.  또한 근본주의는 전투적 근본주의와 온건한 근본주의로 분열되었다.  전자는 자유주의를 관용하는 교단으로부터 분리를 강조하며, 그런 교단에 속한 근본주의자와의 교제도 거부한다. 밥 죤스대학교의 설립자 밥 죤스가 이를 대변한다.  한편, 후자는 엄격한 분리주의를 주장하지 않는 그룹이다.  무디성서학원, 달라스신학교, 탈보트신학교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근본주의가 약화되었음에도,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1930년대에 일부 근본주의자들이 새로운 교회와 교단 창립을 통해 신 근본주의 운동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1929년 매첸(J. Gresham Machen)은 프린스톤신학교 교수직에서 쫓겨난 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하게 되었으며, 1936년에는 점차적으로 자유주의화되는 북장로교에 대항하여 정통주의 장로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1941년에는 매킨타이어(Carl McIntire)의 주도로 반 현대주의적인 미국 교회 협의회(the American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가, 그리고 1948년에는 반 W.C.C.적인 국제 기독교 협의회(the 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가 창립되었다.  1950년에는 근본주의의 교리를 근본신조로 하는 성서 침례회(the Bible Baptist Fellowship)가 창립되었다.  성서침례회는 급 성장하여 미 대륙에서 가장 큰 근본주의의 교단이 되었으며 현재 약 4000개의 지 교회를 가지고 있다.15)  

 

  근본주의는 본래 보수적인 종교운동으로 시작되었으나 점차 그 영역이 문화, 사회, 정치 분야까지 확대되었다.  특히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미국의 근본주의는 극단의 정치적 보수주의와 손을 잡았다.  근본주의자들은 종교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 및 정치적인 문제에도 보수적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연합이 가능했던 것이다.  1970 -80년대에 급속히 성장한 근본주의는 팔웰(Jerry Falwell)의 주도로 정치적 행동 그룹인 "도덕적 다수"(the Moral Majority)를 창설하여 정치인을 위한 선거운동에 깊이 관여했다.

 

 

3. 근본주의 신학

 

  근본주의는 본래 성경과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믿는 것이다.  근본주의 교리 대부분은 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의 교리와 다를 바 없다.  근본주의는 "한 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유했던 신학을 부분적으로 그리고 평신도의 관점에서 되살려낸 것"이다.16) 

 

  근본주의 교리는 5개 조항으로 요약될 수 있다. 성경 무오설과 그리스도에 관한 4개의 교리, 즉 동정녀 탄생, 대속적 죽음, 육체적 부활 그리고 육체적 재림이 그것이다.  성경 무오설이 성경의 초자연적 기원을 강조하는 것이라면, 나머지 교리는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기원을 강조하는 것이다.  근본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전술한 5개 조항을 기독교 신앙의 근본 원리로 간주하지만, 그 외에도, 그리스도의 기적, 인간의 전적인 타락 등의 교리를 포함하기도 한다.

 

  근본주의 교리의 중심점은 성경이다.  근본주의는 성경 무오와 축자 영감, 성경에 대한 문자적 해석을 강조한다.  근본주의는 성서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책이므로 어떤 종류의 과오, 즉 신학적 과오는 물론 역사적, 지리적, 과학적 과오도 없다"고 주장한다.17)  근본주의자는 성경을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전투성이 복음주의자와 근본주의자 사이의 분기점이다.

 

  전 천년왕국설은 근본주의의 형성과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근본주의는 사회참여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는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중요한 도구로서 전 천년설을 사용했다. 특히 전 천년설을 옹호하는 세대주의가 근본주의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전통적 전 천년주의자와 세대주의자들은 성경의 무오성을 믿고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한편, 자유주의자와 대항해 싸움으로써 근본주의의 형성에 토대가 된 것이다.18)  그러나 근본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문자적, 육체적 지상 재림을 기독교 신앙의 근본 원리로 간주했지만, 재림의 때와 방법에 대해서는 통일된 견해를 제시하지 않았다.  그들 중 많은 수가 전 천년주의자와 세대주의자였으나, 모든 전 천년설자가 반드시 세대주의자였던 것은 아니었다.  또한 모든 근본주의자가 반드시 전 천년주의자도 아니었다.  근본주의자 중에는 후 천년주의자와 무 천년주의자도 없지 않았다. 

 

  요약하면, 근본주의 신학은 새로운 것이나 독창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개신교 정통주의와 동일했다. "근본주의는 현대주의와 대결하는 정통주의다."19)  근본주의자들은 정통주의 신학사상으로부터 몇 가지 교리를 도입하여 이를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정통성의 표준으로 삼았다.  근본주의 신학의 기본적 특징은 저항주의와 분리주의로 요약된다. 근본주의는 현대주의, 성서비평주의, 과학적 진화론 등에 대항하기 위해 일어난 전투적 반작용이며, 근본교리를 보존하려는 전략이 분리주의였다.

 

 

 

II.  신 복음주의

 

  신 복음주의는 근본주의 영향권에서  성장한 온건한 보수주의  기독교인들의 운동이요, 자유주의와 근본주의 중간에 위치하기를 선호하는 북미 개신교 내의 제3 세력이다.  그것은 양자의 약점을 극복하고, 종교개혁 신앙을 회복하려고 하는 온건한 보수주의 그룹이다.  최근에는 신 복음주의란 용어 대신, 간단히 복음주의란 용어가 주로 사용되고 있다.

 

  신 복음주의는 역사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근본주의와 어떻게 구분되며,  그 특징은 무엇인가?

 

 

1. 근본주의의 분열

 

  근본주의는 현대주의와 자유주의에 맞서 초자연주의를 옹호하며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요소를 성실히 보존하는데 공헌했다. 반면, 지성적 면에서는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켰다. 학문을 불신하고, 합리적 추론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했다. 신앙을 이성에  반대적인 것, 또는 합리적 분석이나 비판적 평가에 의해 도달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했다.  이것이 신앙에 대한 추론을 거부하는 비교화주의(obscurantism)를 일어나게 했다.

 

  신 복음주의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근본주의 영향권에서 성장한 젊은 학자들이 근본주의의 모순을 자각하고 그것을 개혁하려 한 것에서 태동되었다.20) 그들은 정통 교리를 유지하면서도, 학문적 연구에 가치를 부여하고, 사회문제에 적극적 관심을 표명했다.  특히 그들은 근본주의의 교리보다도 그 적용을 문제시했다. 흔히 신 복음주의의 선언서로 불리는 [현대 근본주의의 불편한 양심]에서 칼 헨리는 근본주의의 사회적 무관심을 지적하고, "불편한 양심"은 근본주의의 성서적 진리가 아니라 그것을 현대의 중요한 문제들에 효과적으로 적용하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근본주의의 문제점은 분파적 분리주의, 문화적 고립주의, 개인적 율법주의, 금욕주의적 윤리, 고등교육에 대한 회의, 지나친 논쟁 지향주의, 무비판적인 정치적 보수주의 등이다.  근본주의는 독특한 사회적 비젼을 지닌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제시하지 못하고, 기독교 복음의 한 측면만 강조했다. 따라서 그것은 지나치게 내세 지향적이고, 반지성적이어서 교육받은 대중들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21) 

 

  신 복음주의의 출현은 이런 근본주의의 내적 분열, 반지성주의, 사회적 부 적절성 등에 대한 젊은 학자들의 비판과 항거였다. 근본주의에 대한 비판 그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이미 주류 교회와 학자들이 수 십 년 동안 그것을 비판하고 공격했다. 그러나 이 새로운 비판은 근본주의 외부가 아닌, 내부로부터 온 것이라는 점에서 이전 것과 구분된다.  그것은 파괴적인 것이 아닌, 건설적 비판이었다.  그것은 근본주의에서 성장한 학자들이 근본주의 운동이 본래의 진로로부터 벗어났다고 평가하고, 그 방향을 재 설정하려는 시도였다.  오켄가, 칼 헨리, 카넬(Edward John Carnel) 등을 중심으로 명문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한 젊은 학자들이 근본주의의 분리주의를 거부하고 주류 교회 내에 복음주의 신학의 활력을 회복시키는 운동을 전개했다. 그들은 종교개혁 주류의 입장을 회복하면서 세상을 긍정하고 문화를 포용하는 복음주의적 비젼을 가지고 있었다.22) 

 

  근본주의의 분열은 두 경쟁적 조직체의 출현으로 표면화되었다. 1941년 칼 맥킨타이어(Carl McIntire) 주도로 창립된 미국 교회협의회(the American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와 1942년 해롤드 오켄가(Harold John Ockenga)에 의해 조직된 전국 복음주의자 협회(the 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가 그것이다. 전자는 회원 자격으로 엄격한 분리주의와 교회 연방회의(the Federal Council of Churches)와의 단절을 요구했다. 반면, 후자는 교회 연방회의에 가입한 교단의 개인에게도 회원자격을 허락했으며, 그 회원에는 오순절파, 성결파, 침례파, 메노나이트파, 감리교도, 개혁교도들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그 회원 교단은 대부분 규모가 작은 군소 교단이었으며, 남 침례교, 루터교 미주리대회, 흑인교회와 같은 규모가 큰 보수교단은 가입하지 않았다.

 

  전국 복음주의자 협회(NAE)의 초기 지도자들은 본질적으로 근본주의자였다.  근본주의자와 복음주의자가 갈라지게 된 결정적 사건은 1957년 빌리 그래함의 뉴욕집회였다.  그래함은 그 집회를 위해 뉴욕 교회 협의회의 후원을 받았다.  그것은 많은 근본주의자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칼 헨리, 오켄가 등의 지도자들이 그래함과 제휴했다.  그들은 극단적 근본주의자로부터 자신들을 구분하기 위해 신 복음적 또는 복음주의적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2. 신 복음주의의 특징

 

  신 복음주의자들은 전통의 본질적인 것은 보존한 반면, 극단적인 것은 포기했다.  그들은 근본주의자들의 기본적 관점, 즉 "기독교 안에서 만약 그것을 포기한다면, 역사적으로 이해되어 왔던 기독교 신앙자체를 포기하는 것과 꼭 같은 핵심적인 기독교 교리가 있다."는 주장을 정당한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은 성서의 문자적 영감, 무오성, 절대 권위에 대한 확신, 유일한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관, 회심과 인격적 신앙체험의 강조와 같은 근본주의의 기본 신학 관점을 유지했다.  또한 자유주의자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권리가 없다는 근본주의의 주장에 동조하여 현대신학을 불신하고 반대했다.  반면, 근본주의의 단순한 성서주의, 대중주의, 행동주의에 대응하여,  그들은 성서의 다양성에 대해 점차 인식하게 되었으며, 수준 놓은 고등교육을 열망하고 연구를 중시하기 시작했다.  근본주의자들의 분리주의를 주장하지도 그들의 엄격한 도덕 조항을 강조하지도 않았다.  신 복음주의자들은 흔히 전 천년주의를 지지했으나 세대주의적 유산은 거부했다.

 

  신 복음주의는 근본주의의 결점들을 교정하려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오켄카는 1960년 [크리스챠니티 투데이]에 게재된 그의 글에서 신 복음주의의 목적을 분명히 제시했다.

 

  "복음주의자는 성취되기를 바라는 일반적인 목적들을 가지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세속사회 가운데서 기독교를 부흥시키는 것이다. 복음주의자는 기독교를 현대생활의 주류 변두리로부터 그 한 가운데로 구출하기를 원한다. 지성적 토대 위에서 신앙을 변호할 수 있는 학자들을 배출하는 것에 의해 학계에 정통주의에 대한 새로운 존경을 획득하기를 원한다. 교단들을 현대주의에 포기하기 보다 오히려 교단 내부로부터 교단의 지도력을 재 집권하기를 소망한다. 그의 입장이 신학적 논의에서 고려되어야 할 정도로 그것을 주의 깊게 재 진술하려고 한다. 기독교가 많은 개혁질서 개혁의 주원인이 되기를 원한다."

 

  이를 요약하면, 신 복음주의의 기본 목적은 학적 존경심, 사회참여, 교단방향의 재 설정을 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주의의 특징은 몇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복음주의적 열심과 지성적 학문성을 결합한 것이다.  근본주의자들은 확신과 열심의 사람들이었으며 무지를 미덕으로 생각할 만큼 반지성적이었다. 고등교육의 가치를 평가 절하하고, 그것을 하나님 나라 추구에 장애물로 취급했다. 반면, 신 복음주의자들은 신학적 연구를 통해 정통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는 변증학을 발전시키고, 교육과 학문을 촉진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둘째, 신앙의 사회적 의의를 강조한 것이다.  기독교는 그 메시지를 사회적 병폐에 적용시키는 것을 전통적으로 강조해왔으나, 근본주의는 주로 개인 구원문제에 관심을 둔 나머지 이를 소홀히 해왔다. 그들은 사회적 타락현상을 종말의 징조로, 그리스도 재림의 서곡으로 간주하고, 사회 참여를 사회 복음신학의 독약으로 취급했다. 신 복음주의자들은 이런 태도를 사회 부 정의와 퇴보를 조장하는 것으로 비판하고, 복음적 메시지를 사회에 적용하는데 헌신적이었다. 

 

  셋째, 영혼을 구원할 뿐 아니라 문화를 변혁시키는 복음에 대한 비젼을 회복한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은 복음을 주위 문화에 적응시키기 위해 복음을 개정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 반면, 근본주의자들은 문화를 죄악시하거나 문화에 폐쇄적이었다. 특히 후자는 현대 사회의 변화에 적응하기 보다 오히려 의도적으로 그것으로부터 고립되었다.  반면, 신 복음주의는 복음의 원상태를 보존하면서 세상을 긍정하고 문화를 포용하는 복음주의적 비젼을 가지고있다. 따라서 현대 문화를 분석, 비판하는 동시에, 문화적 참여를 강조한다. 

 

  신 복음주의에 속한 핵심 인물로는 위에서 언급한 오켄가(Harold J. Ockenga), 칼 헨리(Carl Henry),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을 외에도, 카넬(Edward J. Carnel), 래드(George E. Ladd), 칸저(Kenneth Kantzer), 램(Bernad Ram) 등이 있다. 최근 활발하게 저술 활동을 하고 있는 복음주의 학자들은 대부분 신 복음주의자에 속한다.  블로쉬(Donald Bloesch), 그랜츠, 맥 그라스, 막크 놀(Mark A. Noll), 크노크 등이 그들이다. 신 복음주의 학교로는 풀러신학교, 위튼대학(Wheaton College)등이 있고, 잡지로는 크리스챠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  그리고 기관으로는 전국 복음주의자 협회(the 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 등이 있다.  신 복음주의는 근본주의자들 이외에도, 미국 주류 교단, 즉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의 보수주의자들,  세대주의자들, 성결 및 오순절 운동가 등 다양한 배경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들은 비복음주의자들과의 대화, 학문에 대한 새로운 관심, 사회적 관심 등을 통해 근본주의를 주류 교회와 연결하려고 시도했다.

 

  신 복음주의 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은 칼 헨리다.  그는 가장 탁월한 현대 복음주의 신학자 중 하나이며, 시카고의 북부 침례교 신학교 교수였다. 1947년 근본주의의 약점에 대한 그의 염려를 서술한 [불편한 양심]을 출판했으며, 동시에 새로 설립된 풀러신학교 교수로 부임했다.  그는 [현대 정신의 재건], [믿음의 이유], [개신교의 딜렘마], [서구 사상의 방황], [하나님, 계시 및 권위) 등 일련의 저술을 통해 복음주의 신학을 체계적으로 제시하며, 복음주의 사상의 주요 대변자가 되었다.  특히 그는 1956부터 1968년까지 [크리스차니티 투데이]지의 편집장으로 활동하며, 신 복음주의의 취지와 신뢰도를 높이는데 크게 공헌했다.  빌리 그래햄 역시 신 복음주의 형성에 중요한 공헌자였다.  크리스처니티 투데이와 그래함이 주도한 신앙운동은 신 복음주의의 상징이었다.

 

 

3. 진보적 복음주의

 

  신 복음주의는 1950년대 미국에서 중요한 대중 운동으로 성장했으며, 1970년대 초에 이르러서 그 중요성이 인정되고 가시화되었다. 그러나 신 복음주의는 성경 무오성 문제로 두 그룹으로 분열되는 진통을 겪기도 했다.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은 무오를 신앙에 대한 테스트로 강조한 반면,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은 무오가 성서의 권위를 정의하는 방법으로는 너무 편협하다고 생각했다.  전자는 성경의 전적 무오와 완전 영감을 믿는 반면, 후자는 대부분 성경의 제한된 무오를 주장한다.  제한된 무오설은 성경 가운데 계시된 부분, 복음에 관련된 부분, 성경의 중심 주제, 즉 신앙과 실천에 관련된 부분에는 오류가 없는 반면, 비 계시적인 부분, 복음과 관련 없는 부분, 성경의 주변적인 문제에 관련된 부분에는 오류가 있다는 견해다.  신 복음주의 교육센터인 풀러신학교는 이 문제로 분열되었으며, 진보주의자의 손에 넘어갔다.  그라함과 크리스챤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의 지원을 받은 근본주의적 신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의 무오성을 복음주의 신앙의 분수령으로 간주하며 이를 강조했다. 이를 주도한 사람은 크리스챤니티 투데이의 편집자 린드셀(Harold Lindsell)이었다.

 

  보수적 복음주의자로 분류되는 인물은 오켄가, 칼 헨리,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칸저(Kenneth Kantzer), 린드셀(Harold Lindsell), 칼슨(D. A. Carson), 웰스(David  F. Wells), 놀(Mark Noll) 등이다. 반면, 진보적 복음주의에 속하는 인물은 넬(Edward J. Carnel), 토마스 오든(Thomas Oden), 래드(George E. Ladd), 램(Bernad Ram), 블로쉬(Donald Bloesch), 핀녹(Clark Pinnock), 그렌츠(Stanley  Grenz) 등이며, 학교는 풀러신학교,  위튼대학, 골든-콘웰신학교 등이다.

 

  1990년대 이후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이 복음주의의 중심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다. 최근 활발한 저술 활동을 하고 있는 복음주의 학자들은 대부분 이 그룹에 속한다. 따라서 이들이 21세기 복음주의 신학계를 주도할 것이라고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진보적 복음주의의 최근 동향은 어떠한가?  북미 복음주의 신학계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막크 놀(Mark Noll), 스탠리 그렌츠와 진보적 복음주의의 대표 격으로 간주되는 핀녹을 중심으로 살펴하자.

 

  놀은 프랜팅가(Cornelius Plantinga,Jr.), 웰즈(David Wells)와 공동 집필한 "복음주의 신학의 오늘날"에서 복음주의의 스캔들을 치유하기 위한 처방으로 복음주의 신학의 갱신을 제의하고 있다. 복음주의 사상이 오랫동안 밀폐되었던 지성적- 신학적 다락방으로부터 나오려한다면, 현대적 사고의 영향에 개방적이어야 하며, 현대 사상과의 솔직한 대화 통한  복음주의 신학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 따라서 놀은 복음주의자들에게 현대 철학, 역사, 사회과학은 물론, 비복음주의적 자원도 개방적 자세로 활용할 것을 권한다. 또한 "위대한 전통과 현대 정신 사이의 경계선에서 조심스럽게 활동하는 신학"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23)   

 

  그렌츠의 [복음주의 신학의 수정: 21세기를 위한 새로운 의제]에 따르면, 우리는 현대로부터 현대후기로 전환되는 시대에 살고 있으며, 이 전환기는 어떻게 우리가 새로운 정황에서 복음주의 전통의 거장들에게 영감을 준 비젼을 표현해야 하는가에 대한 솔직한 생각을 요구한다.24) 따라서 그렌츠는 복음주의 신학의 중요한 요소들을 성서적이며 복음주의적 조명 아래 재고하며 신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제의한다. 

 

  그렌츠의 수정 복음주의는 20세기 후기 근본주의적 복음주의자와 특히 신학 방법론에서 구별된다. 첫째, 성서와 더불어 신학적 상황을 강조한다. 근본주의적 복음주의자들은 신학에 대한 명제적 접근을 옹호하여 성서에 내재하는 교리 체계를 발견하는 것을 신학의 과제로 생각했다. 그들은 신학을 성서의 가르침을 조직화하는 것으로, 신학자의 중심 과제를  성경을 요약하는 것으로, 그리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를 명제적이며 불변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오직 성서만이 관심의 대상이며, 성서 안에서 자신을 계시한 하나님이  신학의 대상이었다. 반면, 그렌츠는 오직  성서 만이라는 전통적 신념에 신학의 상황화에  대한 관심을 통합하려고 한다. "새로운 복음주의적 페러다임을 위한  우리의 연구는 신앙 공동체와 더불어 시작해야 한다. 신학을 적절히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상황 내에서 그것을 검토해야 한다."25) 신학은 단순히 성서 내용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 공동체의 신앙을 반성하며 신앙 공동체의 실재를 진술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은 항상 문화적, 역사적 조건이 주어지는 상황적 학문이며, 항상  변하는 것이다. 신학자들은 "그 시대의 아이요 그 시대에 전달자"다. 따라서 그 시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성서의 영원한 진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그들의 문화를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둘째, 신학의 3 규범 또는 기둥을 주장한다.  근본주의적 복음주의는 성서를 신학의 유일한 규범으로 간주한다. 반면, 최근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점증적 지지를 얻고 있는  신학 방법론이 "웨슬리의 4변형"(quadrilateral)이다. 웨슬리는 신학적  권위의 근거를 성경, 전통, 이성, 경험에 두고 이 네 가지 근원이 언제나 균형을 유지하는 상호의존적인 사변형의 신학을 전개했다.  그랜츠는 웨슬리의 4변형을 검토하고, 그 대안으로 신학의 3 규범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성서의 메시지, 교회의 신학적 유산 그리고 현대의 역사-문화적 상황이다.  이것은 그렌츠가 웨슬리의 4변형 가운데 경험을 삭제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는 경험을 별개의 신학적 자원보다는 오히려 신학적 과제의 초점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렌츠는 참으로 만족할만한 신학은 이 세 자원들, 즉 성서의 메시지, 유산 및 문화가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는 신학이라고 생각한다.26) 

 

  그렌츠의 신학 방법론은 독창적이거나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신학 작업에서 인간의 역사적 상황이나 문화의 역할을 강조한  것은 복음주의 신학의 지평을 확대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수정 복음주의는 그렌츠 자신뿐 아니라 최근의  많은 복음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변호되고 있다.27) 

 

  한편, 그렌츠가 신학 방법적인 측면에서 복음주의의 전통적 입장을 수정하고 있다면, 핀녹은 보다 구체적으로 교리적인 면에서 수정을 가하고 있다. 그의 개방적 신론,  포괄주의적 구원론, 조건적 불멸설 등이 그것이다.

 

  개방적 신론(the open view of God)은 기독교  전통적 신론이 하나님의 정적이며 초월적 면을 강조하는데 반해, 하나님의 내재성과 관계성을 강조하는 견해다.  전통적 신론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법적인 이미지로 이해하는데 비해, 개방적 신론은 가족적 이미지로 이해한다. 하나님은 발전적일 뿐 아니라 개방적이다.  스스로 사랑 가운데 세상에 의해 한정받으며, 그의 명령과 체험도 세상의 사건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개방적 신론은 기독교 고전적 유신론과 과정신학의 신고전적 유신론의 중간 길을 택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며, 이를 지지하는 복음주의 학자로는 핀녹 이외에도, 보이드(Gregory Boyd), 프랜클린(Stephen Franklin), 라이스(Richard Rice) 등이 있다.28) 

 

  포괄주의적 구원론은 기독교 절대주의와 종교 다원주의를  절충하는 입장으로, 다른 종교나 문화권에 있는 경건한 사람은 사실상 기독교인이므로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다. 대부분의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은 기독교 절대주의를 포기하고, 구원의 범위를 보다 넓게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 중 하나가 핀녹의 온건한 포괄주의다. 그는 기독교 신학은 구원의 보편성과 포괄성에 대해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성서가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의지를 증거하고 있는 것(딤전2:4,  요일2:2)과 기독교 밖의 수많은 사람들과 종교들은 무조건 모두 멸망한다고 하는 것은 기독교적 정신이라 할 수 없다는 것 때문이다.  따라서 핀녹은 다른 종교들도 인류 구원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완전한 구원을 제시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준비하는 것이다.29) 

 

  조건적 불멸설은 인간은 본래 유한한 존재며, 불멸성은 하나님이 신앙을 조건으로 인간에게 주시는 은총의 선물이라는 주장이다. 신자는 불멸, 곧  영생을 누리게 되는 반면, 불신자는 존재의 소멸에 이르게된다.  조건적 불멸설은 지옥의 존재나  악인의 지옥형벌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지옥형벌을 부정한다. 그것은 악인의 최종적 파멸을 지옥의 본질로 이해한다.  조건적 불멸설은 전통적 견해가 사랑과 은총의 하나님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다. 현대 복음주의자 가운데도, 조건적 불멸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이 있다.  죤 스토트(John Stott), 필립  휴그스(Philip Hughes), 죤 웬햄(John Wenham), 핀녹Clark Pinnock) 등이다.

 

  특히 핀녹은 [매이지 않는 사랑](Unbounded Love),  [지옥에 관한 네 가지 견해] 등의 저서에서 공개적으로 조건적 불멸설을 변호하고 논증했다. 첫째, 조건적 불멸설은 보다 성서적이다. 전통적 견해는 하나님이 악인에게 영원한 형벌의 고통을 준다고 보는 반면,  그것은 새디스틱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전자는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과 일치되지 않으나, 후자는 일치된다.  둘째, 조건적 불멸설은  도덕적으로 더 정당하다. 전통적 견해는 하나님을 피에 굶주린 괴물(monster)처럼 그리고 있는데 반해,  조건적 불멸설은 하나님이 악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셋째, 그것은 법적으로 더 타당하다. 전통적 견해는 악인이 받아야할 것 이상의 영원한 형벌을 요구하는데  반해, 조건적 불멸설은 일정 기간의 형벌과 소멸을 요구한다. 넷째, 그것은 형이상학적으로 더  의미가 있다.  전통적 견해는 천국과 지옥이 영원히 공존하는 우주론적 이원론에 기초하여 악과 고통이 지옥에서 계속 존재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궁극적 승리와 구속의 의미를 약화시키고 있다. 반면, 조건적 불멸설은 지옥의 본질을 파멸로 이해함으로써 죄와  죽음과 사단의 세력에 대한 그리스도의 완전한 승리를 적절히 나타내고 있다.

 

  요약하면, 현대 복음주의는 대중 운동으로서는 성공했으나, 신학 및 지성적인 면에서는 실패했다. 그것은 근본주의의 반지성적 경향 때문이었다. 이러한 복음주의의 지성적 스캔들은 신 복음주의의 등장과 더불어 어느 정도 극복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 복음주의는 보수적 복음주의와 진보적 복음주의로 분열되었다.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은 자유주의 신학의 실패를 지적하며, 성서적 기독교의 재발견과 정통 기독교 신앙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반면,  진보적 복음들은 현대 사상과 상황에 개방적 태도를 취하며, 그것에 근거하여 기독교 전통신학을 개정하려고 한다.

 

 

 

  결 론


  근본주의는 20세기 초 자유주의와 현대주의의 도전으로부터 성서적이며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을 보존하기 위하여 일어난 종교운동이다.  근본주의는 정통주의의 교리 중 다섯 가지 항목을 기독교 신앙의 근본원리로 강조했으며 핵심은 성경의 무오설과 축자 영감설이었다. 반면, 근본주의는 세속주의, 현대 과학의 진화론, 자유주의, 역사 비평적 방법론을 극렬히 반대했다. 따라서 근본주의자들은 호전적이고 공격적이었다. 

 

  근본주의의 역사적 의의는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복음주의적 신앙과 교리를 수호하려 한 것과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자유주의의 위험성을 각성하게 한 것이다. 초자연주의를 옹호하고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요소들을 성실히 보존하려 한 것이 그 공헌이다. 근본주의가 성서의 무오성과 초 자연성을 부정하는 자유주의에 반대한 것은 정당하다.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원리들을 보존하려는 열심과 순수성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근본주의는 신 정통주의 보다 더 공격적이고 전투적이었으나, 자유주의를 효과적으로 공격하지는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신 정통주의들은 자유주의 교사들로부터 교육받고 자유주의자로 출발했으나, 그들의 자유주의 공격이 더 예리하고 혹독했다. 외부의 비평 보다 그 약점을 정확히 알고 공격하는 내부의 비평이 더 결정적이었다.

 

  한편, 근본주의는 지성적 측면에서 적지 않은 문제를 일으켰다. 그것은 반지성주의의 새로운 원인이 되었다.30) 근본주의는 종교문제에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거부할 정도로 이성과 학문을 신뢰하지 않았다. 근본주의는 과거의 것을 단순히 보수하고 반복하는 것을 신학의 과제로 간주했다. 따라서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복음을 재 진술하고자 하는 학문적 노력을 소홀히 했다. 근본주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지성을 사용하려는 노력에 부정적이었다. 또한 근본주의는 반지성적일 뿐 아니라 또한 지나치게 내세 지향적이었다. 따라서 사회적 비젼을 지닌 기독교 세계관을 제시하는데 실패했다.31) 

 

  신 복음주의의 출현은 현대 미국교회에 복음주의의 부흥을 일어나게 했으며, 보수주의 학계에 반지성적 경향이 개선되는 새로운 지성적 활력을 불어넣었다. 복음주의는 전통적으로 체험과 정서를 강조한 반면, 지성과 교리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것은 대중 운동 차원에서는 상당한 성과를 이룩했으나, 지성적인 면에서는 취약했다. 진지한 지성생활을 유지하는데 실패하고, 대학교와 예술, 고급문화의 영역을 포기했다. 그것이 복음주의의 스캔들로 지적되기도 하고, 심지어 복음주의에는 신학이 없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신 복음주의는 복음주의 지성의 르네상스를 이룩하고, 복음주의 서적 출판을 활성화했다. 신 복음주의의 중요한 업적은 현대 후기의 급진 신학에 굴복하지 않고 근본주의적 극단성의 늪으로부터 복음주의 교회와 신학을 구출하는데 크게 공헌한 것이다.

 

  신 복음주의자들이 복음주의 지성을 주도하고 있으나, 신 복음주의 역시 보수적 복음주의와 진보적 복음주의로 분열되었다.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은 자유주의 쪽으로 편향하여 복음주의 신학을 개정하려고 하는 반면,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은 전통신학과 현대 사상의 경계선에서 조심스럽게 활동하고 있다.

 

* 주석

1)Martin Marty, A Nation of Behavers(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6), p.80.

2) Ibid., pp.81 -82. 캠벨에 의하면, 신복음주의는 천5백5십만명, 자유주의자는 2천만명, 급진주의자는 십만명으로 추산된다. 반면, 몽고메리에 의하면, 복음주의자는 목사의 24%, 신자의 20%이며, 자유주의자는 목사와 신자의 25%, 급진주의자는 목사의 1%, 신자의 0.01%를 차지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3) 팩커(J. I.Packer), [근본주의와 성경의 권위], 옥한음 역(서울: 한국 개혁주의 신행협회, 1973), p. 24.

 

4) 필자의 참고문헌 가운데 제임스 바(James Barr)의 [근본주의신학]은 비판적 관점에서, 팩커의[근본주의와 성경의 권위]는 긍정적인 입장에서, 그리고 김기홍의 [프린스톤신학과 근본주의]는 우호적인 입장에서 근본주의를 취급하고 있다.

5) George M. Marsden, Fundamentalism and American Cultur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0), p.4.

6) Ibid., p.169. 로스는 근본주의를 "공격적 보수주의자들, 신앙을 위해 투쟁하는 것을 자신들의 의무로 생각하는 보수주의자들의 느슨한 초교파적 연맹"으로 보았다.

7) H. Richard Niebuhr, "Fundamentalism," Encyclopedia of Social Sciences, Vol.VI(New York, 1937), pp.526-527.

8) Ernest R. Sandeen, "Toward a Historical Interpretation of the Origin of Funda- mentalism,"  Church History 36 (March, 1969), p. 67. [근본적인 것들]에 논문을 기고한 저자들 중 19명이 세대주의자였으며, 세대주의의 전천년설, 성경의 문자주의, 축자 영감설 등이 근본주의의 주요 교리가 되었다.  프린스톤신학은 근본주의 운동에 조직과 지도자와 기본적인 신학체계를 제공했다.

9) George M. Marsden, Fundamentalism and American Culture, pp. 4, 43.

10) Secondin,  "Fundamentalism : challenge and dangers,"  p. 4.

11) [근본적인 것들]이 출판되기 이전에는 근본주의자와 보수주의자가 구분되지 않았으나,  그 책이 출판된 이후로는 극우파 보수주의자들을 근본주의자라고 부르게 되었다.

12) Clarence E. Macartney, "Shall Unbelief Win?  An Answer to Dr. Fosdick,"  The Presbyterian, July 13 and 20, 1922.

13) Clarence E. Macartney, "Shall Unbelief Win? An Answer to Dr. Fosdick," The Presbyterian, July 13 and 20, 1922.

14) David L. Smith, A Handbook of Contemporary Theology(Wheaton: Victor Books,1992), p.12.

15) Ibid., p. 18.

16) Niegel M. de S. Cameron(ed.), The Challenge of Evangelical Theology(Edinburgh: Rutherford House, 1987), pp.1-16.

17) Ibid., p.48.

18) 전 천년설은   교회와 세계 내에서 근본주의의 위치 설정을 위한 분명한 골조를 제공했다.  근본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 일어날 큰 배교와 현대주의의 태동을 동일시했다. 김기홍, pp.40 -41.

19) N. J. Cohen(ed), The Fundamentalist Phenomenon(Grand Rapids: Eerdmans,1990), p.57.

20) 근본주의의 문제점은 분파적 분리주의, 문화적 고립주의, 개인적 율법주의, 고등교육에 대한 회의, 지나친 논쟁 지향주의, 무비판적 정치적 보수주의 등이다.

21) 알리스트 맥그라스,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서울: 한국 장로교출판사, 1997), P.39.

22) 특히 헨리의 [현대 근본주의의 불편한 양심]는 신 복음주의의 선언서로 간주되는데, 여기서 그는 복음주의자들에게 문화적 참여를 강조하고 있다.

23) Mark Noll, Cornelius Plantinga, Jr., and David Wells, "Evangelical Theology Today,"Theology Today (January 1995), pp. 495-507.

24) Stanley J. Grenz, Revisioning Evangelical Theology: A Fresh Agenda for the 21st Century(Downers Grove: InterVasity Press, 1993), p.17.

25) Grenz, Revisioning Evangelical Theology, p.75.

26) Ibid., pp. 92-93, 100.

27) Ibid., p.83.

28) Clark Pinnock et al., The Openness of God: A Biblical Challenge to the Tranditional Understanding of God (Downers Grove: InterVarsity, 1994).

29) Dennis L. Okholm & Timothy R. Phillips(ed.), More Than One Way?: Four Views on Salvation in a Pluralistic World(Grand Rapids: Zondervan, 1995), pp. 95-102.

30) Mark A. Noll, The Scandal of the Evangelical Mind(Grand Rapids: Inter-Varsity Press, 1994), p.115f.

31) Alister McGrath, Evangelicalism & the Future of Christianity(Downers Grove: Inter Varsity Press, 1995), p.39.

 

 

* 출처: 목창균의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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