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프리메이슨

 

일본의 프리메이슨 역사를 보라! 서기 1883년(고종 20년)~1959년(리승만 대통령의 집권 원년은 1948년이다.)을 생각해 보라!  

  일본의 대동아전쟁을...

  당시 일본의 지배자들은 모두 사탄을 숭배하는 프리메이슨이었다. 일본과 손을 잡고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히틀러도 프리메이슨 이었으며, 일본의 왕족들로 프리메이슨 들이었다.

   당시 일본과 독일 그리고 유럽과 미국의 프리메이슨들과 모두 피로 맹세한 같은 형제들이었다. 그들은 서로 짜고 세계2차 대전을 일으켰으며, 미국의 진주만 공격도 사전에 잘 계획이 되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제국주의 일본이 조선의 침략한 것은 프리메이슨들의 계획이었다.  아래에 열거 되어 있는 이름들을 보라!  일본에서 아주 유명한 프리메이슨 7인의 명단이다. 

 

七人の有名な日本人メィーソン
produced with thanks to material supplied by Norinaga Miyoshi JGW

 

鳩山一郎    1883-1959    政治家。

彼鳩山は東京帝国大学の法学部を卒業、1915年に日本の議会の下院に初当選した。鳩山は犬養および斎藤総理大臣の内閣の教育大臣に任命された(1931-34)。戦前の政友会政治政党のリーダーであり、彼は保守的な戦後の自由党を設立し、その最初の党首になった。一連の移動において、彼は民主主義政党を結成し、吉田茂総理大臣を免職し、連続3つの内閣を成形するようになった(1954-56)。

鳩山は19553月、東京でメィソンにな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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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薫、伯爵 1850-1913

 

林は、日本語のローマ字を発明した横浜のヘボン博士と英語を勉強した。その後、彼はロンドンのユニバーシティ・カレッジで勉強した。徳川政府の崩落のために戻り、徳川軍に加入した、しかし、日本橋の伝馬町において捕らえられて、投獄された。英国の外交官とヘボン婦人の介在のためにだけ、彼の生命が救われた。1889年には、彼は兵庫県の知事に任命されて 1891年に外務大臣の次官に任命された。1885年には、林は中国大臣に任命された、そして 1887年に、ロシア大臣その後イギリス大使そして1902年に日英同盟に署名する。19136月、東京で、林は人力車から落ちて、彼の腿を壊した、順天堂病院で足を切断されて十分に回復しなかった、19137月になくなりました。

彼は時事プレスと慶応義塾大学の創立者、福沢諭吉、と友情は深かった。

林は19035月にイギリスのエムパイヤ・ロッジ、でメィソンになれた。1905年には、彼はイギリスのユナイテド・グランド・ロッジのシニア・グランド・ワーデンとして敬われ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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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久邇稔彦、親王 1887-1990

 

東久邇は帝国軍大将で、唯一の帝国のファミリーの内閣総理大臣だった。内閣はほんの54日続き、19458月に昭和天皇の依頼で成形された。彼の行政により、日本軍隊の解体、USSミズーリでの日本の降伏への署名、および戦争犯罪者の逮捕を計画した。

彼は太子、久邇宮朝彦親王の9番目の息子として誕生した。人生にわたって、彼は風変わりな行動のために知られていた。 1923年にフランスで7年間研究する為に日本を出発、その後、息子の葬式への出席を断って戻って来なかった。後、彼は東京に食料雑貨店を開いたけれども、結局失敗した。1930年代には、彼は短命の神道宗派、東久邇教を結成、彼自身をその指導者と取り決めている。彼は、年老いた1990年に、102才で死んだ。

19576月、東久邇は東京の友愛ロッジでメイソンにな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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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周 1829-1897

 

西は明治時代に大学生であって、哲学、心理学、および法律において西洋の本を解釈した。

1865年、オランダから帰国と同時に、彼は開成所(?)において国際法の教授に任命されて、それは後で東京帝国大学の法学部になった。後には、彼は東京アカデミーの学長として勤務し、1889年には、彼は現在消滅した貴族院に任命された。彼は、1897年に男爵に敬われた、彼の死の2日前の131日。彼はよく”現代の哲学の父”とみなされて、オーギュストコムトとジョンスチュアートミルの考えを日本に導入した。彼はまた、西周介と知られている。 成人に達するとすぐに、彼が名前を変更し、その時代の慣習であり、名の最後の文字を落とし、残っている文字を「あまね」と発音していた。

西は1864年にオランダのライデンでメイソンになった

引用文:西周および現代日本考え、トーマス・ヘイヴェンズ、プリンストン大学プレス、1970により出版され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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沢田教一 1936-1970

青森市で誕生する。

1961年に、25才の沢田は、東京のユナイテド・プレス・インタナショナル社(UPI)の写真家になった。ベトナム戦争がエスカレートした時に、沢田は繰り返しベトナムへの派遣を要求した、「それはアメリカの戦争」と言う理由で断られた。結局、1965年、沢田はUPIから休暇を取り、一人で戦争を取材した。9ヶ月後の1966年に、彼は、世界プレス写真コンテストおよびピューリツァー賞を獲得し、ベトナム通信員としてUPI社員に戻った。またすぐに世界プレス写真コンテストのグランド賞を優勝した。カンボジアのラオスでの死の後に、彼は、海外プレスクラブのロバートキャパ金メダルを受け取った。

沢田は196012月に青森ロッジでメイソンになった。

 

沢田教一  

1961年に、25才の沢田は、東京のユナイテド・プレス・インタナショナル社(UPI)の写真家になった。ベトナム戦争がエスカレートした時に、沢田は繰り返しベトナムへの派遣を要求した、「それはアメリカの戦争」と言う理由で断られた。結局、1965年、沢田はUPIから休暇を取り、一人で戦争を取材した。9ヶ月後の1966年に、彼は、世界プレス写真コンテストおよびピューリツァー賞を獲得し、ベトナム通信員としてUPI社員に戻った。またすぐに世界プレス写真コンテストのグランド賞を優勝した。カンボジアのラオスでの死の後に、彼は、海外プレスクラブのロバートキャパ金メダルを受け取った。

沢田は196012月に青森ロッジでメイソンにな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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沢田教一                                                沢田のピューリツァー賞写真

 

 

津田真道、男爵 1829-1903

 

津田真道iは、1829年に、津田真一郎で誕生し、成人に達するとすぐに名前を正道に変更しその後名を真道に短縮した。津田は、西周とともに、西洋の言語と法律と経済学を勉強するために、明治政府によってオランダに行き、経済面に弱い政府は、この信頼出来る学者の経済の意見を頼りにした。これは、1853年に世界へ門を開いた日本の継続的テーマであった。即時に、政府は西洋の考えの学者的な解剖のためのニーズを分かった。1855年には、政府は、江戸で日本の学者が、外国語を翻訳する訓練の目的で学校を開いた。1856-1862で蕃書調所(野蛮人の文書の研究所)として、その学校は、最初そのカリキュラムに、オランダ語、そして後ほど英語、フランス語およびドイツ語を加えた。この研究所では経済学は教えかったけれども、その職員(最も著名な神田隆平と津田真道)の多くは、西洋経済の考えの最初の翻訳者および普及者であった。その上、この学校は、1877年に設立された東京帝国大学、日本の最初の大学、と他の政府出資された学校の基礎になった。東京大学は、多くのより早く設立された学校と違って、その概念から経済学をそのカリキュラムに含めていた。しかし、テキストだけの翻訳では、西の経済学のような複雑な問題において日本人を教育することについて十分ではなかった。多くの武士(明治の学者はほとんど武士)が直接得た知識を集めるために、外国に旅行して、経済学のクラスに出席して講座を聞いた。有名なのは神田隆平、西周と津田真道であった。 1872年に西周と津田真道は一緒にオランダに旅行した、サイモン・ヴィセリングの下で経済学を勉強するために。帰国と同時に、二人は西洋学の他の提案者と一緒に「1873会」を設立した。1873会は、学者的な討論を「明六雑誌」というジャーナルで出版した。後にこのジャーナルは、資本家理論の理解について重要な役割を果たす。

津田真道は、他に「夫と妻の区別(?)」および「売春の消去について(?)」を書いた。

津田は、1864年に35才でオランダのライデンでメイソンにな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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デストロイヤー 1932-

 

ディック・ベィーヤは、NYマイナーリーグ野球のバッファローのピッチャーの息子だった、子供として極めて活動的であった。彼は、高校スポーツに参加した、後シラキュース大学(S. U。)のフットボール奨学金を得た。S.U.では、彼は、1953年にオレンジ・ボウルゲームを勝った東選手権チームの共同主将であった。S.U.での教育修士号を得た後に、彼は、バッファロー、エド・ドンジョージからプロレスリングをすることで採用された。

ジョージの若い大学アマチュア・チャンピオンを訓練するために、はベィーヤをオハイオ州のコロンバスに送った。米国の最も大きい商圏のうちの1つを持っているアル・ハフトと言うプロモーターが受けた。 そこで、ベィヤはディック・ハットン、ビッグ・ビル・ミラー、およびレイ・スティーブンスのような有名なレスリング選手の下でトレーニングし、19541015日にエディ・アルバーズに対して最初のマッチを行った。

 

19624月には、彼はロサンゼルスでレスリングするゆ電話をうけた。マスクをつけてデストロイヤーと言う名前でレスリングをしようと初めて分かって狼狽した。マスクは女性のガードルで作られて、それを管ソックスのように彼の頭の上に被せた。彼の特徴の歪みは彼を凶暴であるように見えさせて、実際彼の顔の悪表現を助けた。日本人は彼を「白い悪魔」と呼んだ。もちろん、ほとんどのレスリング選手は伸ばし易いマスクを取り去ろうとした、もし彼が3つの落下マッチで2つ又は2つのピン落下の服従を失ったならばマスクを外すを約束した。

 

1963の前半で、デストロイヤーは、オリンピックスで正平ジャイアント馬場と3つのマッチを行った。これらのマッチは伝説的で、日本でデストロイヤーとジャイアント馬場を有名人にした。それは、19991月にジャイアント馬場が死ぬまで、10年間続いた二人の間の敬意と親交の始まりでもあった。19635月には、デストロイヤーは、初めてWWA世界チャンピオンとして来日した。力道山という日本に君臨するプロレスリング・チャンピオンと試合するため。7000万人の人々がそのマッチをテレビで見た。それは、今でも日本の歴史の中で2番目に高いテレビの視聴率であると主張される。1963122日に彼は日本に2回目の旅行をし、NWA国際タイトルにチャレンジした。この旅行の後、日本の力道山〈日本のプロレスリングの父〉はクラブで刺され、1週後に死んだ。

 

1972年には、デストロイヤーは、日本テレビとジャイアント馬場と六年間東京でレスリングをすることを契約した。日本での滞在六年間で、彼は、ジャイアント馬場が全日本プロレスリングを設立することを手伝って、彼自身もテレビ・タレントになった。1973から1977までは、日本で一番人気があった喜劇テレビシリーズ「噂のチャンネル」のスターだった。1979年米国へ帰国後、彼はトロントとモントリオールの間で働いた。

 

デストロイヤーは、19937月に8500のマッチの後でレスリングをすることを退職し、彼の息子カートとの頂点のマッチを東京の武道館で行いレスリングを終えた。彼は、19956月に先生として退職したが、まだ高校で水泳のコーチをやっています。

 

 

次に:形而上学


The Destroyer was made a Mason

 


 

 일본은 동양의 프리메이슨 기지 ,임진왜란을 일으킨 제수이트

일본은 동양의 프리메이슨 기지


프리메이슨은 유태인에 의해 성장하여 유태인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한 비밀 조직

이지만 공공연히 세상에 알려지고 있으며, 점차 그 베일이 베껴지고 지금 세계의

모든 국가의 저명한 정치지도자,경제인,학자,군장성은 프리메이슨 요원이거나
그 요원에 의해서 발탁된 인물이 아니면 출세할 수 없는 단계에 까지 와있다.
일본은 지금, 공공연하게 회원을 모집하는 단계까지 와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의 경우는 국부하라는 손문, 장개석 등이 프리 메이슨 회원이며
필리핀에도 깊숙히 침투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손문의 삼민주의사상은 프리메이슨의 정신에서 파생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일본의 경우 수상을 비롯하여 대장상이 되려면 프리메이슨 회원에 가입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이다. 일본 수상의 70% 이상이 프리메이슨 회원이며
일본 재계의 마쓰시다 역시 프리메 이슨 회원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심지어 소화천황도 전후 맥아더 원수의 권유에 의해서 프리메이슨에 가입될 정도였다.
전범이면서도 처형되지 않았던 것도 프리메이슨 회원에 가입했기 때문이 아니겟는가.

일본은 동양권의 프리메이슨 기지로서 적극 활용되고 있으며 상당한 유태인의 자금이

일본에 유입되어 일본의 정계,재계에 투입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후에 프리메이슨 자금인 M 자금이 키신저에 의해서 일본에 유입되어
이를 관리하기 위해 일본회라는 조직이 설립되어 초대 총재에 사도 전 수상이 선임됐고,
후임역시 수상급 인물이 M 자금을 관리해 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유태의 세력의 핵심이 되고 있는 프리메이슨과 대항하는 것보다

유태인 세력에 합류하여, 세계 정복에 동참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http://blog.empas.com/bangillam/10035953


삼변회(삼각회)는 프리메이슨 조직의 3변은 미국,유럽,일본 세 세력을 가리킨다.
이들의 진정한 목적은 세계의 경제권을 독점하고 각 국가의 정권보다 더욱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여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라고 배리 골드워터(Barry Goldwater)상원의원은 그의 저서에서 밝혔다.

일본에 프리메이슨 지부가 생긴것은 1092년과 1263년에 요코하마에,

1401년에는 고베에 지부가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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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을 일으킨 제수이트

1547년 7월, 일본 큐우슈우 (九州)에 상륙한 예수회 신부 프란시스 사비에르(Francis Xavier)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를 허용한 일본 최고 지배자였던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예수회 신부들을 만나 명과 조선을 정복하여 전역에 교회당을 세우고 그들 백성들을 천주교인으로 만들겠다고 호언하며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당시 천주교가 포교에 열을 올린것은 새로 생긴 개신교가 새로운 나라나 대륙에퍼지는 것을 막기위해 먼저 들어가서 선점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며,

예수회가 일본에 조총을 전수한 프란시스 사비에르 신부는 카톨릭 사제로 예수회 창립멤버 6인중 일인임.그리고 천주교는 막강한 자본력을 가지고 뒤에서

적극적으로 후원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실제로 세스페데스 신부(예수회)가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군에 종군하여

조선에 전도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들 가운데에는 기독교에 개종한 자들이 다수 있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후, 1611년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天家康)의 천주교 박해 때에는

무려 21명의 조선인이 순교하였다.

콘스탄티누스가 바빌론 종교와 그리스도교를 혼합해 만든 거짓 그리스도교인

로마카톨릭(천주교)은 마틴 루터 같은 신앙인들의 종교개혁으로 인해 무너져버렸다.

교황은 좌절했고 종교재판으로 그리스도교를 뿌리뽑아 없애려하던 도미니크수도회도
좌절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군사적인 지식에 해박하고 정치적 식견이 풍부한 뛰어난 전략가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는 교황을 알현하여서 세계의 정치와 경제를 장악하고

세상의 종교를 교황청을 중심으로 통합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그는 곧 루시퍼를 숭배하는 일루미나티 지부를 창설하고 '예수회(Jesuite)'를 창설하였다.

로욜라는 천주교에선 성 이나시오로 불린다. 그가 설립한 예수회 지부는 바다를 건너고 산맥을 넘고 대항해를 하며 어디든지 못간 곳이 없었다. 그들은 곳곳에 지부를 설립하고
거짓 그리스도교 신앙을 알리며 정치인들이나 상인들과 거래했다.

그런 목적으로 그들은 일본으로 항해했다.

1543년. 천주교 예수회 신부들이 탄 포르투칼의 상선이 일본 의 바다에 도착하여서
일본의 어린 영주에게 그들은 화승총을 선물하였다. 그 화승총을 그 후 계속 보급하여서
일본으로 하여금 정복적 야욕을 뜨게 하는 첫 계획에 착수하였다.

조중화라는 임진왜란 전문가가 저술한 '다시쓰는 임진왜란사'를 보면
프란시스코 사비엘 이라는 천주교 신부가 일본 땅에 1549년 에 정식적으로 와서
포교를 시작하며 그와 함께 온 유럽인들이 화승총을 계속 보급했다고 하는데.
프란시스코 사비엘은 예수회 소속이었다. 그는 포르투칼의 예수회 신부였다.
(26p~28p)
화승총을 조총으로 개량하고 삼단철포부대를 운영하여서 일본 을 제패한
오다 노부나가는 천주교 예수회를 적극후원하였다. (31p)
'다시쓰는 임진왜란사'는 이 후 오다 노부나가의 대를 이은 히데요시는 임진대전쟁을

일으켰다고 나온다.
그런데 이 대전쟁을 권유한 배후의 인물이 고니시 유키나가 였다고 한다.
(61P)
고니시 유키나가는 천주교 신자였으며 특히 예수회에게 세례를 받은 인물이다.
예수회 신부 세스페데스를 같이 데리고다니며 신부들과 함께 조선땅을 밟으며
온갖 미사와 고해성사를 하게 한 이 인물은 정유재란 때 포로로 일본에 끌려간

강항의 '간양록'에 보면 그가 소오 요시도시와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전쟁을

할 것을 권유했다고 일본국민들이 서로 수군수군 거렸다고 말한다.(61p)

고니시가 이 전쟁을 일으킨 이유는 분명하다.

천주교는 세계의 정치와 경제를 장악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선 조선반도와 일본열도

그리고 중국 등지를 차지하여서 그곳에서 자본을 많이 얻어내야 했기 때문이다.

예수회 신부는 틀림없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속삭였을 것이다.

"전쟁을 일으키면 우리 예수회가 중국은 물론 인도까지 정복시켜줄것이다."

그래서인지 히데요시는 인도까지 정복할수있다고 너무나 자신만만했고
심지어 부채의 앞 과 뒷면에다가 중국어와 조선어를 써서 달달 외웠다고 말한다.

여기서 독자들이 명심해야할 바는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예수회 비밀조직은
예수를 믿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다른 예수' 즉 거짓예수를 믿는 자들로

그들은 익히 들어오던 루시퍼의 숭배자들이다.

그들의 위험성을 알아차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 무모한 전쟁이 끝난 이후
천주교인들을 일본에서 씨를 말려버려서 예수회를 추방시켜버렸다.

그러나 예수회는 수백년이 흐른 뒤 함포를 단 미국 함선들을 끌고와 일본땅에 쏘며
협박하게하여 결국 일본을 개항시키게 해버렸다. 그리고 예수회는 급속도로 일본 열도를 점령하고 그에 이어서 조선을 일본이 점령하게하여서 천주교인들이 거기에 합법적으로 드나들수있게 하였다.
굳이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대원군이 예수회와 천주교인들을 목을
잘라가며 개항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인이나 위인으로 존경해오던 김대건 신부나 알퐁소 신부 조차

예수회의 소속임은 이미 알려진 상식이다.

이미 예수회는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익히 알려진 존재이며 공개적으로 활동하고있다.

무서운건 개신교가 아니라 예수회와 천주교임을 알아차리자. http://blog.empas.com/rpflff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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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프리메이슨은 장사꾼, 정복자, 전도자 등 여러 모습으로 세계를 향해 뻗어갔다.

체구는 왜소했지만 쇼군을 중심으로 뭉쳐서 강한 군사적 응집력을 보이는 일본에서는

문화전도사, 장사꾼의 모습만을 보였다.

그들이 일본에 소개한 물목 중에는 후추도 포함되어 있었다. 임진년에 조선 땅을 밟은

일본장수들은 기생들 앞에서 후추를 뿌리며 호기를 부리기도 했다.
후추를 즐길 수 있을 만한 ‘무사계급’임을 과시하는 것일 터이다.
프리메이슨은 대마도 도주 요시토시와 그의 장인 고니시 유키나가를 통해 서양의

문물을 일본에 소개했다.
영주 고니시 유키나가는 프리메이슨의 국제무역을 통해 재산을 크게 불려나갔다.

김훈은 ‘칼의 노래’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기독교를 묘사하고 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부산에 상륙하여 동래성을 함락하고 조령을 넘어 북진했던 고니시의 부대는 줄곧

큰 깃발을 앞세우고 있었다'.

'붉은 천에 흰 글씨로 십자가가 그려진 깃발이었다'.

그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유언으로 철병을 명하면서 6년에 걸친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왜군은 철수를 서둘러야만 했다.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충무공은 목에 걸린 큰

가시였다. 앞길을 막고있는 큰 바위였던 것이다.
충무공이 바다의 요충을 가로막고 있어 도저히 해상 퇴각로를 뚫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고니시는 퇴로를 찾아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면서도 조선 양민들의 목을 베어 소금창고에 옮기는 작업을 계속했다.

조선 양민들의 목을 벨 때에도 그의 진영에는 변함없이 붉은 천에 열십자가 그려진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조선 양민들의 베어진 목들이 고니시 유키나가에게는
제삿상의 돼지머리보다 훨씬 처리하기 쉬운 고깃 덩어리에 불과했다.

어느날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선 양민의 목 수백개와 함께 전령을 명나라 수군 장수

진린에게 보냈다. “조선인의 목인지 일본군의 목인지 누가 구분할 수 있겠소?
이 수급들을 전과 보고용으로 명나라 황제에게 보내시오. 남의 나라에 와서 힘들여

싸울 필요는 없는 것 아니겠소? 진린 장군께서는 이제 해상 퇴각로를 열어주시오.

우리는 이만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오.”

하지만 충무공은 더 많은 왜군의 목을 베어 진린에게 보냄으로

퇴로를 열어주지 못하도록 했다.』
소설 ‘칼의 노래’에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치껴든 십자가 깃발이 역사적 사실이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프리메이슨계 선교사가 전한 복음의 영향을 받은 사람임이 분명하다.
십자가 깃발을 앞세우고 전쟁에 나가는 것은 템플기사단이나 프리메이슨들이 흔히 사용하는 전형적인 ‘과시’였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을 의미한다.
만약 고니시의 양민 살육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하나의 중요한 의문을 던질 수 밖에 없다.
과연 고니시는 그리스도인인가? 그 답은 ‘아니다’이다.

 그에게 그리스도란 승리의 여신 니케 (Nike)에 불과했다.

십자가 깃발은 승리를 위한 부적이었다. 고니시 같은 자유 성전 건축가 (Free Mason)가 세우는 성전은 ‘사랑이 없는 광기’이기에 더욱 섬뜩하고 무섭다.

도대체 프리메이슨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왜 그토록 한민족을 말살하려고 하는 걸까

 출처ㅣ추억여행으로가는길 작성자:호동과 낙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