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프리메이슨

 

일본의 대동아/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의 지배자들은 모두 사탄을 숭배하는 '프리메이슨 회원들'이었다. 일본과 손을 잡고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히틀러도 프리메이슨 회원이었으며, 일본의 왕족들도 프리메이슨 회원들이었다니...당시 일본은 독일, 유럽과 미국의 프리메이슨들과 모두 피로 맹세한 같은 형제들이었다. 그들은 서로 짜고 세계2차대전을 일으켰으며, 일본의 미국 진주만 공격도 사전에 잘 계획이 되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단다. 제국주의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병탄, 침략한 것도 '프리메이슨들의 계획'이었다고 하니 글에서는 일본에서 유명해진 7명의 '프리메이슨 회원'을 다루기로 한다 1870년은 이탈리아가 로마로부터 해방된 해이다. 이후부터 영국은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하여 한반도를 방패막으로 삼아, 일본을 무장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시험이 바로 '강화도사건'(운요호사건)인 것이다. 전쟁에도 엄청난 군자금이 소요된다. 수 백년간 쪼개진 채 '번'(藩) 별로 담벼락을 쌓고 있었던 일본이 1867년 '메이지유신'이라 하여, 천황 체제로 돌아 왔지만, 10년 만에 남의 나라를 침략할 정도로 그렇게 신속하게 경제 및 산업이 부흥되었던가? 그럴 수 없다!! 바로 일본의 한반도 접근의 배후에는 시온주의자인 '로스차일드가문'이 있었고, 이들은 프리메이슨 에 속한다.

 

 

 

 

프리메이슨은 유태인에 의해 성장하여 유태인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한 비밀 조직이지만 공공연히 세상에 알려지고 있으며, 점차 그 베일이 벗겨지고 지금 세계의 모든 국가의 저명한 정치지도자, 경제인, 학자, 군장성은 프리메이슨 요원이거나, 그 요원에 의해서 발탁된 인물이 아니면 관계 분야에 출세할 수 없는 단계에까지 와있다.일본은 지금, 공공연하게 회원을 모집하는 단계까지 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중국의 경우는 국부라 하는 손문, 장개석 등이 프리메이슨 회원이며, 필리핀에도 깊숙히 침투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손문의 '삼민주의사상'은 프리메이슨의 정신에서 파생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특히 일본의 경우, 수상을 비롯하여 대장상이 되려면 프리메이슨 회원에 가입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이다. 일본 수상의 70% 이상이 프리메이슨 회원이며, 일본 재계의 마쓰시다 역시 프리메이슨 회원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심지어 '소화 천황'(昭和天皇 )도 전후 맥아더 원수의 권유에 의해서 프리메이슨에 가입될 정도였다. 그가 전범이면서도 처형되지 않았던 것도 프리메이슨 회원에 가입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면죄부를 받은 셈이다. 그러하니, 어찌 그가 감히 '사죄'할 수 있겠는가? 그가 공식으로 '사죄'하면, 그의 배후 세력인 '윗전의 전모'(로스차일드가문의 정체)가 밝혀질테니 말이다. 현실적으로 전혀 불가능(?) 함을 이번 자료를 정리하면서 깨닫게 되었다. 그러기 때문에, 하자르제국이 멸망당하면서, 그들은 전 세계로 흩어졌으며, 그 일부가 중국에 유입되었다가, 정착하지 못하고, 마지막으로 피신한 곳이 바로 '한국'이 아니라 일본이었던 것이다

 

프리메이슨은 세계 정복을 실현시켜 오고 있으며, 그 '수도'(아지트)를 '도쿄'로 삼은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음이다. 전에 필자는 이러한 주제를 밝힌 바 있다 3제국일체 일본은 동양권의 프리메이슨 기지로서 적극 활용되고 있으며, 상당한 유태인의 자금이 일본에 유입되어 일본의 정계, 재계에 투입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후에 프리메이슨 자금인 'M 자금'이 키신저에 의해서 일본에 유입되어, 이를 관리하기 위해 '일본회'라는 조직이 설립되어 초대 총재에 '사토' 전 수상이 선임됐고, 후임 역시 수상급 인물이 'M 자금'을 관리해 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일본의 입장에서는 유태의 세력의 핵심이 되고 있는 프리메이슨과 대항하는 것보다 유태인 세력에 합류하여, 세계 정복에 동참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판단이 오늘날까지도 우리 한반도의 분단과 난국이 그치지 않고 있는 그 원인이라고 보면 거의 무난할 것이라 판단한다. 잠잠하다 싶으면, '독도영유권' 혹은 '역사왜곡'을 들고 나오는 소이가 바로 그 배후 세력인 유태자본' 때문이라는 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실이다.

 

 

<< 프리메이슨 유명 일본 맴버 Freemasonry in Japan  >>

 

1.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郞/1883-1959) 개신교 '침례파' 교인

 

하토야마는 1955년 3월 26일 도쿄에서 프리메이슨 회원 에 가입하였다.


총리 재임 8개월(2009.9.16-2010.6.8=266일/일본역대 6번째 단명총리)만에 사임한 일본의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전 총리의 가문은 일본의 정치 명문가 집안이다. 하토야마 이치로 전 총리는 그의 조부이다 ( 사진). 그의 아버지 하토야마 이이치로(鳩山威一郞)는 전 외상이다. 귀족원(현 참의원)을 지낸 증조부부터 치면 4대째 세습의원이다. 동생은 자민당 소속인 하토야마 구니오(鳩山邦夫) 전 총무상이다.하토야마 이치로는 도쿄 제국대학의 법학부를 졸업, 1915년에 일본 의회의 하원에 첫당선 됐다. 하토야마는 이누카이 및 사이토 총리대신 내각의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1931-34). 전쟁 전의 정우회 정치 정당의 리더이며, 그는 보수적인 전후의 자유당을 설립해, 그 최초의 당수가 되었다. 일련의 이동에 있어서, 그는 민주주의 정당을 결성해, 요시다 시게루 총리대신을 면직해, 연속 3개의 내각을 성형하게 되었다(1954-56)

 

 

2. 하야시 다다스(林董/백작/1850-1913) 영일동맹 (英日同盟) 서명자

 

하야시는 1903년 5월에 영국제국의 롯지(지부)에서 '프리메이슨 회원'에 가입하였다


1895년 일본이 청일전쟁의 승리로 한국에서 청의 세력을 축출하고 독자적 개입을 심화시키는 시점에서 러시아의 도전이 예상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만주는 러시아가 차지하고 한국은 일본이 점령한다'는 기본 입장을 러시아에 표명하였다. 그러나 서양 열강은 러시아가 만주 등 중국으로 진출하는 것을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영국의 중국 진출에도 차질을 빚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1901년 일본의 입장은 러시아의 만주에 대한 단독지배를 인정하지 않고, 여타 제국주의 열강과의 협조 하에 한국 지배뿐만 아니라 중국 분할에도 참가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리하여 영국과의 제휴를 모색하게 되었다. 두 나라의 이해가 결부되어, 그 해 12월 양국은(일본대표:주영 일본 공사 하야시/林董 영국대표:외무대신 랜스다운) 협상 교섭을 하였고, 1902년 1월 30일 런던에서 '영일동맹'(日英同盟/Anglo-Japanese Alliace)을 체결하였다.하야시는, 일본어의 로마자를 발명한 요코하마의 Hepburn 박사와 영어를 공부했다.

 

 

그 후, 그는 런던의 유니버시티·컬리지에서 공부했다. 토쿠가와 정부의 폭락을 위해서 돌아와, 토쿠가와군에 가입했으나, 니혼바시의 텐마쵸에서 잡히고, 투옥되었다. 영국의 외교관과 Hepburn 부인의 개재덕분에, 그의 생명이 구해졌다. 1889년에는, 그는 효고현의 지사로 임명되어 1891년에 외무 대신의 차관으로 임명되었다. 1885년에는, 하야시는 중국 대신으로 임명되었고 1887년에, 러시아 대신 그 후 영국 대사 그리고 1902년에 영일 동맹에 서명한다. 1913년 6월, 도쿄에서, 하야시는 인력거에서 떨어져 그의 허벅지가 으스러졌고, 쥰텐도 병원에서 다리를 절단하였으나 충분히 회복되지 않아 1913년 7월에 죽고 말았다.그는 '시사 프레스'와 '케이오 기쥬쿠 대학'(慶応義塾大学)의 창립자,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와 우정이 깊었다.

 

 

3. 히가시쿠니 나루히코(1887-1990) 일본의 무혈 점령이라고 맥아더 칭송
 
히가시쿠니는 1957년 6월에 도쿄의 '유아이'(友愛) 롯지에서 프리메이슨 회원 에 가입

 
히가시쿠니 나루히코(東久邇宮稔彦)는 1945년 8월 17일부터 1945년 10월 9일까지 일본의 제43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다.일본 육군 대장으로 일본 왕족으로선 유일하게 내각총리대신이 되었고, 전후 일본의 첫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패전 처리 내각으로서 헌정 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왕족 내각을 조성하였으며 연합국에 대한 항복 문서의 조인, 육·해군의 해체, 복원의 처리를 실시하였다.그는 일본의 '일억 총참회'(一億總懺悔)를 주장했지만, 악명높았던 치안유지법을 고수하려다가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민주화 방침에 의해 오래가지 못했고, 역대 일본 내각 성립 이래 재임 최단 기간인 54일 만에 총사직하였다. 그는 두 권의 일기를 남겼다「皇族の戦争日記」「東久邇日記」。

 

 

4. 니시 아마네(西周/1829-1897) 최초 일본인 프리메이슨 회원

 

니시 아마네는 1864년 10월 20일 프리메이슨 회원 에 가입 그의 입회 서명문서는 네델란드 라이덴 대학교안 에 보존되어 있다 (La Vertu Lodge No, 7, Leyden, October 20, 1864)

 

니시 아마네(西周/1829-1897)는 에도시대 후기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 초기까지 살았던 일본의 계몽가, 교육자이다. 에도시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정치 고문이었으며, 메이지 시대에는 귀족원의 위원이었다. 남작의 작위를 받았고, 1897년 훈일등서보장(勲一等瑞宝章)을 받았다. 독일학협회학교(獨逸学協会学校/현재의 독협중학교,고등학교)의 초대교장을 역임하였다. 周助라고도 불린다.이와미노쿠니츠와노번(현재의 시마네 현, 츠와노 정)의 어전의(御典醫)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西時義이다. 카와쿠카이에 모리 오가이(森鴎外)의 생가가 있다. 니시의 생가에는 그가 공부하였다는 방이 보존되어 있다.한자 소양을 기르면서 1841년에 양로관에서 서학 곧 난학 을 배웠다. 1862년 막부에 의해 '츠다 마미치'(津田真道), 에노모토 다케아키 등과 함께 네덜란드로 유학을 가게 되어 피세링(Simon Vissering/1818-1888)에게서 법학과 칸트 철학, 경제학, 국제법 등을 배웠다.1865년에 일본으로 돌아가 '다이세호칸'(大政奉還) 무렵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정치 고문이 되었다. 1868년 막부의 누마쓰병학교 의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5. 사와다 교이치(沢田教 1936-1970) 안전에로 도피'(Flee To Safety)로 퓰리쳐상 수상
 
사와다 교이치는 1960년 12월에 아오모리에서 '프리메이슨 회원'에 가입

 
1936년 2월 22일 일본 '아오모리'시에서 출생. 1970년 10월 28일 라오스에서 사망. 1961년에, 25세의 사와다는, 도쿄의 유나이티드·프레스·인터내셔널사 의 사진가가 되었다. 베트남 전쟁이 격화되었을 때에, 사와다는 반복해 베트남에로 파견을 요구했으나,「그것은 미국의 전쟁」이라고 하는 이유로 거절 당했다. 결국, 1965년, 사와다는 UPI로부터 휴가를 얻어, 혼자서 전쟁을 취재했다. 9개월 후인 1966년에, 그는, 세계 프레스 사진 콘테스트 및 퓰리쳐상을 획득해, 베트남 통신원으로서 UPI 사원으로 돌아왔다. 또 곧바로 세계 프레스 사진 콘테스트의 그랜드상을 수상했다. 캄보디아 라오스에서의 죽음 후에, 그는, 해외 프레스 클럽의 로버트 카파 금메달을 받았다

 

 

6. 츠다 마미치(津田真道, 男爵/1829-1903) 서양 경제 사상의 최초의 번역자
 
츠다는 1864년 35세에, 네델란드 라이덴 대학교에서 '프리메이슨 회원'에 가입

 

츠다 마미치는, 1829년에, 츠다 신이치로우로 탄생해, 성인이 되자마자 이름을 정도로 변경해 그 후 이름을 마미치로 단축했다. 츠다는, 니시 아마네와 함께, 서양의 언어와 법률과 경제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메이지 정부에 의해서 네델란드에 가, 경제면에 약한 정부는, 이 신뢰 할 수 있는 학자의 경제의 의견을 의지했다. 이것은, 1853년에 세계에 문을 연 일본의 계속적 테마였다. 그 즉시, 정부는 서양의 사상의 학자적인 해부를 위한 요구를 알았다. 1855년에는, 정부는, 에도에서 일본의 학자가, 외국어를 번역하는 훈련의 목적으로 학교를 열었다.1856-1862년에 번서조소(야만인의 문서의 연구소)로서 그 학교는, 최초의 그 커리큘럼에, 네델란드어, 그리고 잠시 후에 영어, 프랑스어 및 독일어를 더했다. 이 연구소에서는 경제학은 가르쳤지만, 그 직원(가장 저명한 칸다 타카히라와 츠다 마미치)의 상당수는, 서양 경제 사상의 최초의 번역자 및 보급자였다. 게다가, 이 학교는, 1877년에 설립된 도쿄 제국대학, 일본의 최초의 대학, 이라고 다른 정부 출자된 학교의 기초가 되었다. 도쿄대학은, 보다 일찍 설립된 많은 학교와 달리, 그 개념으로부터 경제학을 그 커리큘럼에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텍스트만의 번역으로는, 서쪽의 경제학과 같이 복잡한 문제에 대해 일본인을 교육하는 것에 대하여 충분하지 않았다.

 

많은 무사(메이지의 학자는 거의 무사)가 직접 얻은 지식을 모으기 위해서, 외국으로 여행하고, 경제학의 클래스에 출석하고 강좌를 들었다. 유명한 것은 칸다 타카히라, 니시 아마네와 츠다 마미치였다. 1872년에 니시 아마네와 츠다 마미치는 함께 네델란드로 여행한, 사이몬 비세링의 아래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귀국과 동시에, 두 명은 서양학의 다른 제안자와 함께 「1873회」를 설립했다. 1873회는, 학자적인 토론을「메이로쿠 잡지」라고 하는 저널로 출판했다. 후에 이 저널은, 자본가 이론의 이해에 대해 중요한 역할을 완수한다.

 

 

7. デストロイヤー(Destroyer) (1932-생존) 역도산 의 최후의 숙적으로서 일본 프로 레슬링사에 잊혀지지 않을 강호

 

디스트로이어는 일본에서 '프리메이슨 회원'이 되었다. 그 일자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본명 '딕 베이어'(Dick Beyer/The Destroyer/Dr. X)는, NY마이너 리그 야구의 버팔로의 투수의 아들이었다. 아이로서 지극히 활동적이었다. 그는, 고교 스포츠에 참가한 후 시라큐스대학(Syracuse University/SU)의 풋볼 장학금을 얻었다. SU에서 그는, 1953년에 오렌지볼(Orange Bowl) 게임을 이긴 동쪽 선수권 팀의 공동 주장이었다. 그는 Fraternity of Phi Gamma Delta's Syracuse Chapter'의 회원이었다. 그리고 그는 미국 '보이스카웃'의 '이글스카웃'(Eagle Scout/자세히보기)이었다. SU에서 교육학 석사를 얻은 후에, 그는, 버팔로, 에드 돈조지에 의해 프로레슬링을 하는 것으로 채용되었다.조지가 젊은 대학 아마츄어 챔피언 훈련을 하기 위해서, 베이어를 오하이오주의 코론바스에 보냈다. 미국의 가장 큰 상권 중 하나를 가지고 있는 알 하프트라고 하는 프로모터가 받았다. 거기서, 베이어는 딕 허튼, 빅 빌 밀러 및 래이 스티븐스와 같이 유명한 레슬링 선수아래에서 트레이닝해, 1954년 10월 15일에 에디 알버스와 최초의 매치를 실시했다.1962년 4월에는, 그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레슬링을 하라는 전화를 받았다. 처음 마스크를 쓰고 '디스트로이어'라는 이름으로 레슬링을 했을때는 낭패했다.

 

마스크는 여성의 거들로 만들어지고, 그것을 관삭스와 같이 그의 머리 위에 씌웠다. 그의 특징의 일그러짐은 그를 흉폭하도록 보이게 하고, 실제 그의 얼굴의 악표현을 도왔다. 일본인은 그를 '흰가면의 마왕'(白覆面の魔王)이라고 불렀다. 물론, 대부분의 레슬링 선수는 늘리기 쉬운 마스크를 제거하려고 했고, 만약 그가 3개의 낙하 매치로 2개 또는 2개의 핀 낙하의복종을 잃는다면 마스크를 벗는 것을 약속했다.1963의 전반에, 디스트로이어는, 오린픽스에서 쇼헤이 자이언트 바바(正平ジャイアント馬場)와 3회전의 매치를 실시했다. 이러한 매치는 전설적이어서, 일본에서 디스트로이어와 자이언트 바바를 유명인으로 했다. 그것은, 1999년 1월에 자이언트 바바가 죽을 때까지, 10년간 계속 된 둘 사이의 경의와 친교의 시작이기도 했다. 1963년 5월에, 디스트로이어는, 처음으로 WWA(세계레슬링협회) 세계 챔피언으로서 일본을 방문했다. 역도산이라고 하는 일본에서 군림하는 프로레슬링 챔피언과 시합하기 위해. 7000만명의 사람들이 그 매치를 텔레비전으로 보았다. 그것은, 지금도 일본의 역사상 2번째로 높은 텔레비전의 시청률이라고 주장된다.

 

 

 

역도산(力道山/리키도잔) 마지막 운명의 한판 (동영상 캡쳐). 1963년 12월 2일 일본(도쿄체육관)에서 인터내셔널 선수권에 도전하기 위하여 2차로 도착한 미국 선수 '디스트로이어'(백가면/白覆面)와 3판 2승제 시합에서 2:1로 이긴다. 디스트로이어의 주특기는 넉자형 굳히기'(四の字固)였으며, 역도산의 주특기는 손등으로 상대를 가격하는 공수 (가라데촙)으로서 상대의 가슴팍을 내리쳐댔다. 왠만한 상대는 그 한방에 나가떨어졌다.

 


 

 일본은 동양의 프리메이슨 기지 ,임진왜란을 일으킨 제수이트

 

일본은 동양의 프리메이슨 기지


프리메이슨은 유태인에 의해 성장하여 유태인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한 비밀 조직

이지만 공공연히 세상에 알려지고 있으며, 점차 그 베일이 베껴지고 지금 세계의

모든 국가의 저명한 정치지도자,경제인,학자,군장성은 프리메이슨 요원이거나
그 요원에 의해서 발탁된 인물이 아니면 출세할 수 없는 단계에 까지 와있다.
일본은 지금, 공공연하게 회원을 모집하는 단계까지 와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의 경우는 국부하라는 손문, 장개석 등이 프리 메이슨 회원이며
필리핀에도 깊숙히 침투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손문의 삼민주의사상은 프리메이슨의 정신에서 파생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일본의 경우 수상을 비롯하여 대장상이 되려면 프리메이슨 회원에 가입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이다. 일본 수상의 70% 이상이 프리메이슨 회원이며
일본 재계의 마쓰시다 역시 프리메 이슨 회원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심지어 소화천황도 전후 맥아더 원수의 권유에 의해서 프리메이슨에 가입될 정도였다.
전범이면서도 처형되지 않았던 것도 프리메이슨 회원에 가입했기 때문이 아니겟는가.

일본은 동양권의 프리메이슨 기지로서 적극 활용되고 있으며 상당한 유태인의 자금이

일본에 유입되어 일본의 정계,재계에 투입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후에 프리메이슨 자금인 M 자금이 키신저에 의해서 일본에 유입되어
이를 관리하기 위해 일본회라는 조직이 설립되어 초대 총재에 사도 전 수상이 선임됐고,
후임역시 수상급 인물이 M 자금을 관리해 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유태의 세력의 핵심이 되고 있는 프리메이슨과 대항하는 것보다

유태인 세력에 합류하여, 세계 정복에 동참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http://blog.empas.com/bangillam/10035953


삼변회(삼각회)는 프리메이슨 조직의 3변은 미국,유럽,일본 세 세력을 가리킨다.
이들의 진정한 목적은 세계의 경제권을 독점하고 각 국가의 정권보다 더욱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여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라고 배리 골드워터(Barry Goldwater)상원의원은 그의 저서에서 밝혔다.

일본에 프리메이슨 지부가 생긴것은 1092년과 1263년에 요코하마에,

1401년에는 고베에 지부가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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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을 일으킨 제수이트

1547년 7월, 일본 큐우슈우 (九州)에 상륙한 예수회 신부 프란시스 사비에르(Francis Xavier)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를 허용한 일본 최고 지배자였던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예수회 신부들을 만나 명과 조선을 정복하여 전역에 교회당을 세우고 그들 백성들을 천주교인으로 만들겠다고 호언하며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당시 천주교가 포교에 열을 올린것은 새로 생긴 개신교가 새로운 나라나 대륙에퍼지는 것을 막기위해 먼저 들어가서 선점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며,

예수회가 일본에 조총을 전수한 프란시스 사비에르 신부는 카톨릭 사제로 예수회 창립멤버 6인중 일인임.그리고 천주교는 막강한 자본력을 가지고 뒤에서

적극적으로 후원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실제로 세스페데스 신부(예수회)가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군에 종군하여

조선에 전도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들 가운데에는 기독교에 개종한 자들이 다수 있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후, 1611년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天家康)의 천주교 박해 때에는

무려 21명의 조선인이 순교하였다.

콘스탄티누스가 바빌론 종교와 그리스도교를 혼합해 만든 거짓 그리스도교인

로마카톨릭(천주교)은 마틴 루터 같은 신앙인들의 종교개혁으로 인해 무너져버렸다.

교황은 좌절했고 종교재판으로 그리스도교를 뿌리뽑아 없애려하던 도미니크수도회도
좌절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군사적인 지식에 해박하고 정치적 식견이 풍부한 뛰어난 전략가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는 교황을 알현하여서 세계의 정치와 경제를 장악하고

세상의 종교를 교황청을 중심으로 통합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그는 곧 루시퍼를 숭배하는 일루미나티 지부를 창설하고 '예수회(Jesuite)'를 창설하였다.

로욜라는 천주교에선 성 이나시오로 불린다. 그가 설립한 예수회 지부는 바다를 건너고 산맥을 넘고 대항해를 하며 어디든지 못간 곳이 없었다. 그들은 곳곳에 지부를 설립하고
거짓 그리스도교 신앙을 알리며 정치인들이나 상인들과 거래했다.

그런 목적으로 그들은 일본으로 항해했다.

1543년. 천주교 예수회 신부들이 탄 포르투칼의 상선이 일본 의 바다에 도착하여서
일본의 어린 영주에게 그들은 화승총을 선물하였다. 그 화승총을 그 후 계속 보급하여서
일본으로 하여금 정복적 야욕을 뜨게 하는 첫 계획에 착수하였다.

조중화라는 임진왜란 전문가가 저술한 '다시쓰는 임진왜란사'를 보면
프란시스코 사비엘 이라는 천주교 신부가 일본 땅에 1549년 에 정식적으로 와서
포교를 시작하며 그와 함께 온 유럽인들이 화승총을 계속 보급했다고 하는데.
프란시스코 사비엘은 예수회 소속이었다. 그는 포르투칼의 예수회 신부였다.
(26p~28p)
화승총을 조총으로 개량하고 삼단철포부대를 운영하여서 일본 을 제패한
오다 노부나가는 천주교 예수회를 적극후원하였다. (31p)
'다시쓰는 임진왜란사'는 이 후 오다 노부나가의 대를 이은 히데요시는 임진대전쟁을

일으켰다고 나온다.
그런데 이 대전쟁을 권유한 배후의 인물이 고니시 유키나가 였다고 한다.
(61P)
고니시 유키나가는 천주교 신자였으며 특히 예수회에게 세례를 받은 인물이다.
예수회 신부 세스페데스를 같이 데리고다니며 신부들과 함께 조선땅을 밟으며
온갖 미사와 고해성사를 하게 한 이 인물은 정유재란 때 포로로 일본에 끌려간

강항의 '간양록'에 보면 그가 소오 요시도시와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전쟁을

할 것을 권유했다고 일본국민들이 서로 수군수군 거렸다고 말한다.(61p)

고니시가 이 전쟁을 일으킨 이유는 분명하다.

천주교는 세계의 정치와 경제를 장악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선 조선반도와 일본열도

그리고 중국 등지를 차지하여서 그곳에서 자본을 많이 얻어내야 했기 때문이다.

예수회 신부는 틀림없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속삭였을 것이다.

"전쟁을 일으키면 우리 예수회가 중국은 물론 인도까지 정복시켜줄것이다."

그래서인지 히데요시는 인도까지 정복할수있다고 너무나 자신만만했고
심지어 부채의 앞 과 뒷면에다가 중국어와 조선어를 써서 달달 외웠다고 말한다.

여기서 독자들이 명심해야할 바는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예수회 비밀조직은
예수를 믿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다른 예수' 즉 거짓예수를 믿는 자들로

그들은 익히 들어오던 루시퍼의 숭배자들이다.

그들의 위험성을 알아차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 무모한 전쟁이 끝난 이후
천주교인들을 일본에서 씨를 말려버려서 예수회를 추방시켜버렸다.

그러나 예수회는 수백년이 흐른 뒤 함포를 단 미국 함선들을 끌고와 일본땅에 쏘며
협박하게하여 결국 일본을 개항시키게 해버렸다. 그리고 예수회는 급속도로 일본 열도를 점령하고 그에 이어서 조선을 일본이 점령하게하여서 천주교인들이 거기에 합법적으로 드나들수있게 하였다.
굳이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대원군이 예수회와 천주교인들을 목을
잘라가며 개항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인이나 위인으로 존경해오던 김대건 신부나 알퐁소 신부 조차

예수회의 소속임은 이미 알려진 상식이다.

이미 예수회는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익히 알려진 존재이며 공개적으로 활동하고있다.

무서운건 개신교가 아니라 예수회와 천주교임을 알아차리자. http://blog.empas.com/rpflff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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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프리메이슨은 장사꾼, 정복자, 전도자 등 여러 모습으로 세계를 향해 뻗어갔다.

체구는 왜소했지만 쇼군을 중심으로 뭉쳐서 강한 군사적 응집력을 보이는 일본에서는

문화전도사, 장사꾼의 모습만을 보였다.

그들이 일본에 소개한 물목 중에는 후추도 포함되어 있었다. 임진년에 조선 땅을 밟은

일본장수들은 기생들 앞에서 후추를 뿌리며 호기를 부리기도 했다.
후추를 즐길 수 있을 만한 ‘무사계급’임을 과시하는 것일 터이다.
프리메이슨은 대마도 도주 요시토시와 그의 장인 고니시 유키나가를 통해 서양의

문물을 일본에 소개했다.
영주 고니시 유키나가는 프리메이슨의 국제무역을 통해 재산을 크게 불려나갔다.

김훈은 ‘칼의 노래’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기독교를 묘사하고 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부산에 상륙하여 동래성을 함락하고 조령을 넘어 북진했던 고니시의 부대는 줄곧

큰 깃발을 앞세우고 있었다'.

'붉은 천에 흰 글씨로 십자가가 그려진 깃발이었다'.


그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유언으로 철병을 명하면서 6년에 걸친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왜군은 철수를 서둘러야만 했다.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충무공은 목에 걸린 큰

가시였다. 앞길을 막고있는 큰 바위였던 것이다.
충무공이 바다의 요충을 가로막고 있어 도저히 해상 퇴각로를 뚫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고니시는 퇴로를 찾아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면서도 조선 양민들의 목을 베어 소금창고에 옮기는 작업을 계속했다.

조선 양민들의 목을 벨 때에도 그의 진영에는 변함없이 붉은 천에 열십자가 그려진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조선 양민들의 베어진 목들이 고니시 유키나가에게는
제삿상의 돼지머리보다 훨씬 처리하기 쉬운 고깃 덩어리에 불과했다.

어느날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선 양민의 목 수백개와 함께 전령을 명나라 수군 장수

진린에게 보냈다. “조선인의 목인지 일본군의 목인지 누가 구분할 수 있겠소?
이 수급들을 전과 보고용으로 명나라 황제에게 보내시오. 남의 나라에 와서 힘들여

싸울 필요는 없는 것 아니겠소? 진린 장군께서는 이제 해상 퇴각로를 열어주시오.

우리는 이만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오.”

하지만 충무공은 더 많은 왜군의 목을 베어 진린에게 보냄으로

퇴로를 열어주지 못하도록 했다.』
소설 ‘칼의 노래’에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치껴든 십자가 깃발이 역사적 사실이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프리메이슨계 선교사가 전한 복음의 영향을 받은 사람임이 분명하다.
십자가 깃발을 앞세우고 전쟁에 나가는 것은 템플기사단이나 프리메이슨들이 흔히 사용하는 전형적인 ‘과시’였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을 의미한다.
만약 고니시의 양민 살육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하나의 중요한 의문을 던질 수 밖에 없다.
과연 고니시는 그리스도인인가? 그 답은 ‘아니다’이다.

 그에게 그리스도란 승리의 여신 니케 (Nike)에 불과했다.

십자가 깃발은 승리를 위한 부적이었다. 고니시 같은 자유 성전 건축가 (Free Mason)가 세우는 성전은 ‘사랑이 없는 광기’이기에 더욱 섬뜩하고 무섭다.

도대체 프리메이슨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왜 그토록 한민족을 말살하려고 하는 걸까

 출처ㅣ추억여행으로가는길 작성자:호동과 낙랑